되살아난 녹화사업 1991년 자주대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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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녹화사업 1991년 자주대오 사건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5.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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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복무 중이던 송재봉씨 등 30여명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몰려
빙고게임하던 껌 종이가 암호해독문

1980년 초반에 집중된 녹화사업이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순화교육’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1990년대 초반에는 군에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을 색출해 조직사건과 연결시키는 새로운 개념의 녹화사업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1991년 청주대에서 불거진 ‘자주대오’ 사건이다.

1991년은 그해 4월 명지대 학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붙잡혀 집단 구타당한 뒤 숨진 사건을 시작으로 노동자, 학생 등 10여명의 분신이 이어지면서 3당 합당으로 정권 재창출을 꾀하려는 노태우정부에 대한 반발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정권이 내놓은 해법은 총체적인 이념공세와 도덕성 시비였다. 1991년 5월 분신한 전민련 간부 김기설씨의 유서를 동료인 강기훈씨가 대필했다며 구속시킨 것을 시작으로 정원식총리에 대한 외국어대 학생들의 계란세례 사건, 서강대 총장 박홍신부의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는 발언 등을 기화로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념공세의 십자포화를 퍼부은 것이다.

자주대오 사건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세상에 알려졌다. 1991년 6월12일 충청북도지방경찰청 공안분실이 ‘현체제를 전복하고 민중정부 수립을 기도하려던 청주대 내 비밀지하조직 자주대오 조직원 8명을 검거해 6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조직의 책임자로 몰린 사람은 송재봉(39·현 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씨와 백상진(39·이시종의원 보좌관)씨 등이었으며,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청주대 운동권 전반으로 확산돼 17명이 구속되고 20명이 불구속 입건되는 대규모 조직사건으로 비약된다.
문제는 이 사건의 진앙이 검찰이나 경찰이 아닌 군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청주대를 졸업한 송재봉씨가 1991년 4월 현역병으로 입대해 강원도 고성의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입대 5주만에 국군기무사령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면서부터 조작이 시작된 것이다. 기무사 요원들은 송씨의 손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고 군복견장을 뗀 뒤 성남의 군부대로 연행해 18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구타를 자행하며 이적단체의 밑그림을 그린 뒤 이를 경찰에 제시해 자주대오를 탄생시켰다.

총학생회 운영규칙은 어느 새 조직의 강령과 규약으로 바뀌었고, 총학생회 공식기관지도 증거물에 포함됐다. 최영환(청주대 신문방송학과 87)씨가 여자친구와 빙고게임을 했던 껌포장지 3장은 북한의 지령을 해독하는데 필요한 암호문으로 둔갑하는 촌극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제대를 불과 사나흘 앞둔 권영환(청주대 지역개발학과 86)씨 등 청주대 출신의 현역 군인과 단기사병 등 5명이 군부대에서 연행돼 조사를 받고 구속됐으며, 이들은 군을 적화시키려 군대에 잠입한 세력들이라며 이념교육의 자료로 활용됐다.
송씨가 지금도 어이없어하는 것은 ‘자주대오’라는 명칭이 당시 취조실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송씨는 “수사관들이 이미 나름대로 밑그림을 그려놓은 상태에서 ‘단 한마디라도 썼던 단어를 모두 말해보라’고 해서 이 말 저 말 언급하다 보니 ‘자주대오’라는 조직의 명칭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자주대오라는 명칭은 이후 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권과 졸업생, 군입대자들을 엮어 조직사건을 만드는데 마치 고유명사처럼 이용된다. 청주대를 시작으로 아주대, 충남대, 한남대, 부산대, 동아대, 경기대, 전남대, 원광대 등 전국에 걸쳐서 같은 유형의 자주대오조직이 잇달아 적발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자주대오 관계자들에게 선고한 형량을 통해서도 이 사건의 조작여부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적단체의 주모자로 지적된 백상진씨와 송재봉씨가 1심에서 1년6개월을 선고받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에 발행된 청주시지에도 청주의 공안사건 편에 간첩단 사건으로까지 등장하는 자주대오 사건의 총책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벼운(?) 선고였다.

송재봉씨는 육군 22사단 영창과 장호원 육군교도소를 거쳐 대전교도소와 목포교도소 등에서 복역하다 1993년 3월 김영삼정부 출범과 함께 석방된다. 항소심에서 1년으로 감형됐지만 1990년 청주대 교지 사건으로 구속돼 집행유예 기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실제 수형기간은 1년10개월에 이르렀다.

송씨는 “지금도 사단 영창과 육군교도소 등에서 당했던 육체적, 심리적 모욕 등을 생가하면 몸서리가 쳐진다”며 “자주대오사건이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으로 선정된 만큼 조작의 주모자 등 그 진실이 낱낱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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