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386들, 시대상황 배제한 마녀사냥은 문제 있다

   
이광재(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의원이 연세대 재학시절 오른손 검지를 자른 것을 두고 월간조선을 비롯한 일부 중앙언론들이 ‘마녀사냥식’으로 이광재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다. 철도공사의 유전개발 의혹사건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자른 병역기피 인물로 여론의 화살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광재의원은 ‘좌광재 우희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노무현대통령의 최측근이다 보니 이 의원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공격과 방어는 노무현정부의 집권 후반기를 뒤흔들 거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마저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배제한 채 ‘이광재의원의 단지’를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두환정권이 이른바 ‘녹화사업’을 통해 ‘운동권 죽이기’에 몰두하던 상황이었고, 12.12 군사반란의 과정 속에서 드러났듯이 하나회 등 군대내 사조직이 국민의 군대를 사병화하는 경향마저 있었던 것이다.

또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가치관을 가졌던 당시 운동권들에게 있어서는 구성원들의 군 입대로 어렵게 싹이 튼 대학 내 학생운동의 맥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도 엄존하는 상황이었다.

이광재의원이 당선 전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운동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 손가락이 잘렸다”고 둘러댔다가 이리 저리 말을 바꾼 것이 문제지 파렴치한 병역기피 인물로 매도하는 시각은 다분히 선정적인 접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 충북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충북의 386 인사들은 “충북에서 손가락을 자른 동료는 없었지만 군 입대 문제는 여러 모로 학생운동권 전반이 고민하던 가장 큰 문제였다”며 “이광재의원이 차라리 처음부터 당당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제 징집, 프락치 활동 강요한 녹화사업
군대를 사병처럼 이용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정부는 골치 아픈 학생운동세력을 약화시키는데도 역시 군대를 이용한다. 1981~198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녹화사업은 학내·외 시위를 차단하기 위해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특별 교육을 시키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으로, 6명이 이 과정 속에서 의문사했지만 지금까지도 전모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녹화사업은 조직사건 뿐만 아니라 단순 시위 과정에서 연행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이와 관련해 휴학계를 내면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돼 군대로 직행하는 형식이었다. 군에 입대한 운동권들은 집중적으로 순화교육을 받아야 했고, 휴가 기간 동안 기밀 수집을 지시받는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녹화사업에 대한 진상규명은 1988년 5공 청문회와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났지만 아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수준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1980년 이후 강제 징집자는 약 1100명 정도.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47명이 1981~1983년 사이에 군대로 끌려갔다. 또 1983년 군대에서 실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알려진 당시 서울대생 한희철씨는 의문사위 조사과정에서 녹화사업에 따른 폭행과 프락치 공작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확인돼 그 비인간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군대 보내려 장학금까지 준 대학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강제 징집은 대학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이루어졌다. 정권이 녹화사업을 위해 채찍을 들었다면 대학은 ‘장학금 지급’이라는 당근을 제시한 것이다. 충북대 운동권의 원조로 통하는 김성구 충북우리밀 대표(46·충북대 생물학과 중퇴)는 1981년 5월 ‘공포정캄가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군대 가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 측의 권고를 받고 휴학을 결심했지만 ‘학생운동의 맥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함석헌선생 강연회에 이어진 육거리 기습시위를 주동해 감옥행을 택한 경우다. 김씨는 1심에서 집시법 시범케이스(?)에 걸려 7년을 구형받았지만 항소심까지 간 끝에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김씨는 “군대를 기피한다는 생각 보다는 어렵게 싹튼 학생운동의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결단으로 행한 일이었다”며 “그래서 전두환정권이 선심을 쓰는 것처럼 던져준 복학조치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녹화사업이 진행되면서 시위를 주동하다 구속돼 ‘실형미필’로 군 입대를 면제받는 사례는 198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7~8년 동안 운동권 핵심들에게 있어 일반적인 상황이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생운동의 자원이 미미하다 보니 조직적으로도 결단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입대하려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군대였던 것이다.

휴가 보내 줄 테니 정보수집해라
운동권들이 군 입대를 꺼렸던 또 하나의 이유는 ‘프락치가 돼 동료들을 팔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통적인 회고담이다. 학생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사건을 터뜨려 민심과 유리시키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군에 입대한 운동권을 기밀 수집활동의 도구로 악용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대학 운동권에서 이른바 ‘프락치 시비’는 심심찮게 벌어졌던 사건으로, 1984년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유시민 현 의원이 프락치로 추정되는 가짜 대학생 4명을 때렸다가 1년6월형을 선고받은 ‘서울대 프락치사건’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사건이다.

군에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은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으며 ‘정의감을 보루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자신이 동료를 팔아야 한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녹화사업의 비인간성은 육체적인 학대 보다 이 같은 정신적 학대가 더욱 심각했다는 것이다.

충북대에 다니던 1983년 11월 학내 유인물사건으로 구속된 뒤 청주교도소에서 1년 간 복역해 군복무가 면제된 구자행 전국자원봉사자협회 사무처장(45·충북대 중어중문학과 80)은 “휴가를 나온 뒤 학교를 찾아온 운동권 동료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부러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보고용’으로 준적도 있다”고 설명한 뒤 “그들은 또 얼마나 괴로웠겠느냐”며 녹화사업의 비인간성을 지적했다.

군 입대, 심각한 후유증으로 이어진 경우 잦아
강혜숙의원의 보좌관인 유수남(42·청주대 국문학과 83)씨는 “밖에 있다가 잡혀도 고문과 구타에 골병이 드는 세상이었는데, 군대는 오죽 했겠느냐”며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지만 후배들이 군대가는 선배들을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유씨의 동아리선배인 김 모씨는 군에서 제대한 뒤 군대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지금은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유씨는 선배 김씨가 휴가를 나올 때마다 “군대 내에서 자행된 조직적인 괴롭힘도 힘들지만 동료 사병들로부터 당하는 괴롭힘에 더욱 힘들어했던 것 같다”며 이와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유씨는 1985년 민정당 충북당사 점거사건 등으로 두 차례 구속돼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이광재 단지, 군 면제 위한 것만은 아닐 것
어찌 됐든 1980년 운동권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것은 당시의 군대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군대였다면 기를 써가면서까지 군 입대를 피할 까닭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모 방송사의 드라마 ‘제5공화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국민의 군대를 철저히 사병화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 공수부대 등 군이 동원된 것도 당시 운동권들이 군 입대를 꺼리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러나 이광재의원의 단지를 바라보는 도내 386들의 생각은 ‘단순히 군 면제를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쪽으로 모아졌다. 개인적 안위와 민주화운동의 갈래길에서 누구나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대였던 만큼 무언가 결단하는 의미의 단지가 아니었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 초·중반에는 운동권들의 속어로 ‘동을 떠서(주동자가 된다는 뜻)’ 군대를 면제받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198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실형으로 2년6개월 이상을 복역해야 군 입대를 면제받게 되자 체중을 조절하거나 도수 높은 안경을 쓰는 등 갖가지 다른 방식이 동원됐지만 실효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박정희정권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30년에 가까운 군 출신 대통령 시대가 종식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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