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항서원(莘巷書院)은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 선도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이다.
서원이란 조선 중기, 16세기부터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설립한 사학(私學)으로 중등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과 함께 나라 안의 많은 당파 싸움을 치르면서 서원이 각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런 효력을 위해 계파별, 종파별로 무분별하게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폐단이 커지게 되었다. 당파와 문중간 시비의 온상이 되었고 일반 민중을 착취하는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흥선 대원군에 의해 1871년에 일제히 정리되고 47개만 남게 되었다.
신항서원에 갈 때 승용차는 서원까지 직접 갈 수 있지만 버스는 서원 전방 약 100m 지점에 있는 시내버스 종점에서 하차하여 걸어서 가야 한다. 이 서원은 선조 3년(1570년) 이 고장(청주) 사림(士林) 즉 모계(慕溪) 조강(趙綱),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진사(進士) 변경수(卞景壽) 등이 공의(共議)하고 불이재(不易齋) 김계생(金繼生)을 창건(創建)의 주된 임무인 도유사(都有司)로 삼아 유정곡(有定谷 : 이고장이 유정골이었음)에 창건하고, 처음으로 조선 세조 - 성종 때 하늘이 나은 효자(孝子)라 일컫던 경연(慶延), 조선 중종 때 학자이며 정치가 박훈(朴薰), 중종 때 학자이며 정치가인 김정(金淨), 인종 때 학식이 깊어 명(明)에 갔다 와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나 무고로 사사된 송인수(宋麟壽) 네 분을 모셨다.
현재의 서원은 1987년 보수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인데 전면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고, 문은 모두 4분합문(閤門)을 달았고, 이 밖에도 강당과 삼문, 행랑이 있으며 건물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둘렀다. 또한 서원 마당에는 숙종 11년(1685년)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가 있다. 이 비는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현감(縣監) 조형기(趙亨期)가 쓰고, 김수환(金壽桓)이 새겨 세운 것이다.
이 밖에도 청주 인근에는 분평동에 구계서원(龜溪書院),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119에 송천서원(松泉書院),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 49에 죽계서원(竹溪書院),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에 국계서원(菊溪書院),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에 쌍천서원(雙泉書院),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에 백록서원(白鹿書院),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에 검암서원(儉巖書院), 청원군 가덕면 노동리 산101에 덕천서원(德川書院),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에 기암서원(機巖書院) 등이 있어 제향을 하고 있다. <김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