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지방사림들이 세운 배움 터 <김태하>

 신항서원(莘巷書院)은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 선도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이다.

서원이란 조선 중기, 16세기부터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설립한 사학(私學)으로 중등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이다.

16세기 국학(國學)인 향약이 쇠퇴하게 되자 지방의 지식인이 지방 교육을 위해 세운 배움터로 순수하게 학문을 닦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서원은 세월이 흐르면서 선현을 봉향하는 일도 하였다.서원(書院)이란 명칭은 당나라에서 유래된 것이고, 신항서원의 명칭은 현종 원년(1570년) 사액에 의한 것이며, 그 유래는 중국의 성현 이윤과 안자의 출생지 '신야'와 '항루'에서 비롯된 것이다.최초의 우리나라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모셨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 서원은 후에 명종 5년(1550년)에 이퇴계의 건의로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현판)과 책, 노비 등을 하사하고 장려하여 이로부터 사액서원이 제도화되고, 그 역할도 커지게 되었다. 숙종 때는 각 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설립되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 송악서원(松嶽書院), 화양서원(華陽書院), 만동묘(萬東廟) 등이 유명하다. 이렇게 서원의 전성기를 이룰 때 신항서원도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에서 제일가는 서원으로 기록된 사실이 있다. ▲ 신항서원 전경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과 함께 나라 안의 많은 당파 싸움을 치르면서 서원이 각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런 효력을 위해 계파별, 종파별로 무분별하게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폐단이 커지게 되었다. 당파와 문중간 시비의 온상이 되었고 일반 민중을 착취하는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흥선 대원군에 의해 1871년에 일제히 정리되고 47개만 남게 되었다.  

신항서원에 갈 때 승용차는 서원까지 직접 갈 수 있지만 버스는 서원 전방 약 100m 지점에 있는 시내버스 종점에서 하차하여 걸어서 가야 한다. 이 서원은 선조 3년(1570년) 이 고장(청주) 사림(士林) 즉 모계(慕溪) 조강(趙綱),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진사(進士) 변경수(卞景壽) 등이 공의(共議)하고 불이재(不易齋) 김계생(金繼生)을 창건(創建)의 주된 임무인  도유사(都有司)로 삼아 유정곡(有定谷 : 이고장이 유정골이었음)에 창건하고, 처음으로 조선 세조 - 성종 때 하늘이 나은 효자(孝子)라 일컫던 경연(慶延),  조선 중종 때 학자이며 정치가 박훈(朴薰),  중종 때 학자이며 정치가인 김정(金淨),  인종 때 학식이 깊어 명(明)에 갔다 와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나 무고로 사사된 송인수(宋麟壽) 네 분을 모셨다.

▲ 9인을 제향하는 사당 그러다 인조 20년(1642년)에 서원을 재건하면서 한충(韓忠)을 추향했고, 효종 1년(1650년)에 임진왜란 때 동래(東來)부사(府使)로 충신 열사의 기개를 굽히지 않아 적장을 감복케 한 송상현(宋象賢)과 광해 - 인조 때 학자 이득윤(李得胤)을 추향하고 또 효종 7년(1656년)에는 청주 목사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만들어 선정을 폈던 대유학자 이이(李珥), 고려 말 대유학자이며 충신이며 청주에 유배 되었던 이색(李穡)을 추향하여 현재 9분을 모시고 제향을 지낸다.신항서원은 당초에는 고장의 명칭을 따라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 했던 것인데, 현종 1년(1660년)에 사액되면서 신항서원으로 개칭한 것이다. 신항서원에서는 원생 30, 자모생 30을 뽑았으며, 매년 음력 3, 9월 초(初) 정일(丁日)에 제향했다. 신항서원도 고종 8년(1871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고종 29년(1892년)에 복구하도록 허가되어 광무 9년(1904년)에 복구되고, 1957년 지방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의 서원은 1987년 보수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인데 전면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고, 문은 모두 4분합문(閤門)을 달았고, 이 밖에도 강당과 삼문, 행랑이 있으며 건물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둘렀다. 또한 서원 마당에는 숙종 11년(1685년)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가 있다. 이 비는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현감(縣監) 조형기(趙亨期)가 쓰고, 김수환(金壽桓)이 새겨 세운 것이다.

이 밖에도 청주 인근에는 분평동에 구계서원(龜溪書院),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119에 송천서원(松泉書院),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 49에 죽계서원(竹溪書院),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에 국계서원(菊溪書院),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에 쌍천서원(雙泉書院),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에 백록서원(白鹿書院),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에 검암서원(儉巖書院), 청원군 가덕면 노동리 산101에 덕천서원(德川書院), 청원군 오창면 기암리에 기암서원(機巖書院) 등이 있어 제향을 하고 있다.    <김태하>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