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몽둥이세례에 25년째 1급 정신질환 앓는 장부용씨
칠순 노부모, 아들 돌볼 사람 없을까봐 차마

1980년 5월20일 고향집(단양)에 가기 위해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 나갔다가 난데없는 계엄군의 몽둥이세례를 받고 25년째 극심한 정신분열증(장해 1급)을 앓고 있는 40대 남자가 있다.
지금도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는 이 남자의 머릿속 시계는 공포로 얼룩졌던 25년 전, 그날 그 순간에 맞춰져 있다.

20살 꽃다운 나이에 고향을 떠나 멀리 광주광역시의 송원공업전문대학(현 송원대학) 2학년에 다니던 장부용(45)씨는 그날 이후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3년여를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그렇게 삶이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혹여나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하여 다락논이며 밭뙈기를 모두 팔아 병간호에 나섰던 아버지 장이식(70)씨와 어머니 문금옥(67)씨도 이제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다만 두 노부부는 자신들의 사후에 세상에 홀로 던져질 아들 장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어머니 문씨는 “이미 이렇게 저질러진 일,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답답한 속을 드러내면서도 “우리 아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보호자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면 여한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15년 전부터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자취방을 놓아가며 아들 장씨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장이식, 문금옥씨 부부를 자택에서 만나 통한의 25년, 그 기막힌 이야기를 수첩에 기록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 전해준 전보
단양군 적성면 소야리에서 농사를 살고 있던 두 부부에게 ‘큰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80년 5월24일이었다. 밭일을 하고 있는데 마을 확성기에서 두 부부를 찾는 이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 장부용씨, 흰머리와 그늘진 표정이 정신적 고통의 무게를 말해준다. /사진 육성준기자 ‘광주에서 폭도들이 난리를 일으켰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렇지 않아도 광주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큰아들 부용씨 소식이 궁금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한 두 부부는 완전히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광주 가는 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이튿날 제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루해가 다 저물어서야 광주에 닿고 보니 어느 민가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들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5월20일 광주항쟁이 터진 사실을 뒤늦게 알고 고향집에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에 나갔다가 계엄군들로부터 곤봉과 발길질 등 무차별 구타를 당해 의식을 잃은 것을 인근 상인들이 보호하고 있다가 학생증에 있는 주소를 보고 전보를 보내 온 것이었다. 장씨가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5월20일은 계엄군과 광주시민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시작된 날로 이날 밤 광주역 광장에서는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 장씨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두 부부가 광주로 내려간 5월25일은 5월21일 도청에서 계엄군이 철수한 뒤 이른바 ‘해방광주’로 칭해졌던 엿새 가운데 나흘 째 되는 날로 도청 앞 광장에서 연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로 다시 진입해 총격전 끝에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면서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 계엄군에 구타 당하는 시민. / 사진제공 5·18기념재단
아들 치료하느라 초근목피로 연명
아수라장과 같은 상황 속에서 구급차가 아닌 열차에 실려 고향집으로 돌아온 장씨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돼 한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육체의 상처는 거짓말처럼 아물었지만 20살 청년의 뇌리를 할퀴고 간 극도의 공포는 밤마다 발작으로 되살아났다.

생계는 유지해야 했기에 낮에는 농사를 짓고 저녁에야 병원을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서울행이 시작됐다. 아픈 장씨를 데리고 10리를 걸어 나가 버스를 타고 제천역에 도착한 뒤 다시 야간열차에 몸을 실어 청량리역에 도착하면 새벽 5시 무렵이었다.

어머니 문금옥씨는 “그때부터 국립의료원이 문을 여는 9시까지 기다리던 안타까운 시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과 대전, 청주 등에 있는 대형병원에 입원한 기간만도 3년여가 넘지만 의사들이 내린 최종 결론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아들을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두 부부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 같은 과정 속에서 두 부부와 7남매 등 9식구나 되는 이들 일가는 쌀독이 바닥나 나물과 풀뿌리로 연명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치료비를 대느라 땅을 헐값에 팔아넘긴 데다, 간병에 바빠 아예 모를 심지 못한 해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문씨는 “100여호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 가장 총명하고 예의바르기로 소문났던 장남이 그 지경이 되고 보니 농사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그 당시에는 광주에 대한 진상도 알려지지 않아 아들에 대한 이웃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들 가족이 15년 전 고향을 떠나 청주로 이사를 나온 이유다.

청주로 온 뒤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취방을 놓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병원비를 대기가 여의치 않아 아버지 장이식씨가 일용노동자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고된 나날이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장남 부용씨를 간호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에도 나머지 자식들이 속 한 번 썩이지 않고 모두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는 것이다.

수면제 없이 잠 못 드는 고통의 세월
장씨는 지금도 종종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는 등 당시의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루라도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 극도의 대인기피증인데, 특히 병원 가는 것을 두려워 해 이가 썩어도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 상황이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타는 속을 달래려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들의 건강상태가 염려스럽지만 이 역시 확인할 길이 없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3년이 아들에게 더 큰 고통이 됐던 것 같다”는 것이 어머니 문씨의 설명이다. 반백이 된 머리에 그늘이 드리워진 장씨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10살은 더 들어 보일 정도로 오랜 정신적 상처가 그의 육체를 황폐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다.

그나마 1998년 김대중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폭도들의 반란이었던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칭해지고 진상조사 과정을 거쳐 장씨도 국가유공자(장해 1급)로 지정됐다. 지정 당시 일시불로 보상금을 받아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장만했다. 그러나 연금 형태의 지원금은 전혀 없고 치료비만 면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버지 장이식씨는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해 한 달치씩 약만 받아다 먹이고 있다”면서 “지금은 부모가 챙겨주지만 우리가 죽고 나면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인가
어머니 문씨는 25년 전 초죽음이 된 아들을 광주에서 데려온 뒤 국가유공자 지정에 따른 확인절차를 위해 한차례 광주를 방문했을 뿐, 그동안 열린 기념행사에는 참석하지 않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5.18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행사에 참석한 뒤 내린 결론은 한마디로 말해 ‘다시는 참석하지 않겠다’였다. “5.18묘역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우는 것을 보니 차마 다시 그 광경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씨는 “5.18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다 실종된 아들을 기다리며 아직도 문을 열고 산다는 어느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래도 우리 아들은 살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털어놨다. 5.18 항쟁 과정에서 희생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부모들에게 있어 19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씨는 또 “아들이 차라리 그 때 죽었더라면 저도, 나도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겼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밥이야 챙겨 먹이겠지 하는 생각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죽으면 누가 돌보나
어머니 문씨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내내 울음이 치받혀 말문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때문에도 그렇지만 두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아들 생각에 더욱 기가 막힌 것이다.

아버지 장이식씨도 “남동생과 누이동생들이 있지만 부모 마음만 같겠냐”면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동생들에게 잘하라고 늘 당부하지만 알아듣는 지나 모르겠다”고 걱정스러워했다.

따라서 이들 부부가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보호시설이 마련되는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대인기피증이 더욱 심해진 것에 비춰볼 때 앞으로도 정신병원이나 일반 수용시설은 아들을 더욱 고통에 빠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혼사를 앞두고 ‘자신도 결혼을 시켜 달라’며 생떼를 부리던 장씨는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 쉰 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결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농사걱정에 자주 편지를 보내오던 자상하던 면모도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목석같은 초로의 남자가 25년 동안 부모의 속을 숯처럼 까맣게 태우고 있는 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어렸을 때 너무 칭찬을 받으며 자라서 운명이 시샘을 했다고들 합니다”

그렇게 ‘1980년 5월20일 이후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이들 부부가 안타깝게 부여잡고 사는 것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던 아들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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