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亂)때 순절한 3인의 충절기려 <김태하>
청주시 수동 87번지에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영조(英祖)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 있을 때 청주 읍성의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 비장(裨將) 홍림(洪霖)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7년에 세운 사당이다.
청주에 사는 사람은 청주가 충절(忠節)의 고장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것은 이 고장에서 많은 충신(忠臣)열사(烈士)가 나왔기 때문이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웠고, 3ㆍ1운동 때에도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이 고장에서 6인이나 나왔으니 이 고장을 충절의 고장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충신이 많이 나오는 고장에는 역적도 나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에 청주에서 반란(反亂)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청주 인근의 괴산군 청천면 송면 사람 이인좌(李麟佐)로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영의정 준경(浚經)의 후손인데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권세를 잡고 소론이 밀려난 것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을 모아서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이며 폭군이므로 무력으로 몰아내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먼저 청주 읍성과 상당산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이인좌는 청주에 잠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술수를 썼다. 우선 무기와 반군을 청주로 이동하는 것을 관(官)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장례 지내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역도들은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을 죽이고 한양을 향하여 갈 때 조정에서는 병조(兵曹) 참판(參判) 오항명이 "임금께서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신이 청컨대 스스로 가서 역도를 죽여 없애겠습니다." 라고 하며 싸우기를 청해서 임금은 갑옷과 투구와 상방검(上房劍)을 하사하여 허락했다.
오항명이 급히 달려와서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에서 역도를 소탕했다. 한편 이 소식이 청주에 전해지자 의병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와 상당산성에 있던 신천영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난 후 이봉상, 남연년,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 7년(1731년)에 청주읍성 북문 안에 사당을 지었으며, 그 후 영조 12년에는 사액 되었는데 1939년 도시계획에 따라서 현 위치(청주시 상당구 수동87)에 이전하고, 1977. 12. 6. 기념물 17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당이 표충사(表忠祠) 또는 일명 삼충사(三忠社)다.
표충사는 건물이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의 사당과 삼문이 있고 주위에는 돌담장을 둘렀다. 사당 동편에는 '삼충사적비'와 '기해월열녀비(妓海月烈女碑)'가 있으며, 삼문 앞에는 1942년에 세운 '표충사이건사실비'가 있어 지난 일들을 되새기게 한다.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상당산성 남쪽에 있는 '것대산봉수대'의 전설이 생각난다.
이인좌가 봉수대를 손에 넣을 때 근처에는 '목노인'이라는 봉화둑지기가 딸 '선이'와 그와 혼인을 언약한 '백룡'이라는 청년이 함께 살고 있었다. 반군은 집으로 들이닥쳐 노인까지 살해했다. 청주로 돗자리를 팔러 간 백룡을 마중 가던 선이가 아버지의 비명을 듣고 달려와 보니 이미 아버지는 살해된 뒤였다.
이는 분명히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판단한 선이가 봉화대로 올라가 불을 당기려 했으나 뒤쫓아온 반란군에게 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집에 온 백룡은 노인과 선이가 반란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되자 분개하여 쇠스랑으로 달아나는 반란군을 죽이고 봉화를 올렸으며, 그 불에 선이와 노인을 화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애절한 전설이 있는 곳에도 지금은 자동차가 갈 수 있게 길이 생겼으나, 막상 현장에는 옛 자취는 없고 그 곳이 봉화대라는 작은 안내판 하나만 있다. <김태하>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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