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다리를 건너 덕주사로 가기 위해 597번 송계로 들어섰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피서지답게 송계계곡은 초입부터 인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물가 노송나무 그늘 아래 만들어진 야영지에는 피서객들이 쳐놓은 텐트들이 만개한 꽃밭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수암 권상하 선생의 영당을 지나 덕주사로 가기 전 잠시 한송초, 중학교를 들렀다. 한말 명성황후가 짓던 별궁터를 보기 위해서였다. 행정 구역상 명칭은 송계리이지만 연세가 지긋한 이곳 어른들은 아직도 이곳을 동창이라고 부른다. 이는 충주에서 동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으로 인근에는 서창리의 서창과 청풍의 북창 등 두 곳의 창고가 더 있었다. 서창이나 북창이 세금으로 걷은 쌀을 보관하던 곳이라면 동창의 주된 목적은 군수품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그만큼 이곳이 지리적으로 요충지라는 의미이다.
상덕주사, 하덕주사라는 것은 본래 절 이름이 아니며 위치에 따라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보물 제406호인 덕주사 마애미륵불이 있는 곳에 있는 절집을 상덕주사, 그리고 현재 덕주사가 있던 자리에 있던 절을 하덕주사라고 부른다. 이 두 사찰은 창건이래 줄곧 법등을 이어오다가 상덕주사는 1951년 빨치산의 은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중 국군 8사단에 의해 폐사된다.
하덕주사는 조선 중기 때 소실되어 없어져 버렸지만 그 존재는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두 절 가운데 어느 절이 먼저 창건되었는지, 혹은 하나의 절로 관리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5㎞ 떨어진 월악산 영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1951년 전까지만 해도 고색창연한 기도사찰로 있었다 한다. 또한 마애미륵불 주위에는 보호각도 있었음을 마애미륵불 둘레에 있는 파여 있는 홈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극락전, 산신각, 요사채 및 방앗간이 있었고, 그 밖에 우공탑이라고 불리는 삼층석탑이 있다. 이 전각들은 앞서 말한대로 한국전쟁 중 불타 없어졌고, 근래에 극락전 자리에서 1622년(조선, 광해군 15년)에 만든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유물로는 석불두, 명문와, 백자잔 및 끌을 비롯한 철제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법의자락 밑으로는 평행하는 종선 옷주름을 새긴 군의를 표현하였다. 좌우로 벌린 두 발은 서로 대칭되어 벌어졌고, 발가락도 큼직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발 좌우에는 발을 감싸듯 큰 연꽃을 배치한 연화대좌는 가로로 나있는 두 줄 선 밑에 너비가 넓은 복련의 연판으로 되어있어 다소 화려해보인다.
고려 초기의 거불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비만해진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해진 조성수법, 입체성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그리고 현저하게 도식화된 주름 등 조형수법은 상의 규모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제작시기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의 양어깨 위 좌우에는 사각형의 건물 가구공들이 남아 있어 조성 당시에는 목조전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마애미륵불이 있는 축대 밑에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하나 있다. 이것이 우공탑이다. 이 탑에는 상덕주사 건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덕주사 승려들이 건물이 비좁아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어디선가 소가 한 마리 나타났다. 스님들은 별 생각 없이 수레에 목재를 실어 놓았는데, 소가 그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스님들은 이상해서 소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지금의 마애미륵불이 있는 곳으로 가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스님들은 무언가 영험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소가 멈추어 선 자리에 부속건물을 짓기로 했다.
소는 부지런히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고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비록 축생이기는 하지만 그 불심에 감복한 사람들은 소의 혼을 기리고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우공탑은 높이 161㎝이며 새겨진 명문은 없다. 탑의 위치나 형태로 볼 때 현재의 위치는 본래의 자리가 아닌 듯하다. 석재도 질이 서로 다르며 방형의 자연석을 지대석, 하대석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그 위에 기단석을 놓았다.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원래는 한수면 역리 정림사지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198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되었다. 나발로 된 머리 꼭대기에는 낮고 작으며 둥그스름한 육계(肉琦)가 있으며, 상호는 밑으로 길게 표현되어 장방형에 가깝다. 두 눈썹은 코에 가깝고 입이 작으며 콧날과 입술 부분은 다소 손상되어 있다. 두 눈은 가늘고 길며 이마에는 지름 2㎝의 백호공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얼굴이 너무 큰 반면 양쪽 어깨는 작아서 움츠린 듯한 모습의 둔중함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인 12∼14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242㎝이다. 약사여래는 중생들의 병을 고쳐 주는 부처님으로 항상 손에는 약 항아리를 들고 있다. 현재 약사여래의 몸은 성한 곳이 없는데 그 이유는 환자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리고 약사여래의 몸에서 자신의 아픈 부위를 긁어다 약으로 썼기 때문이다. 역리석불입상이라고도 하는데, 이 불상은 예부터 불신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어져 인근 농민들이 와서 예불했다고 한다.
덕주사 산신각은 1993년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런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 터에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지었으며, 안에는 성일화상이 가로 180㎝, 세로 210㎝의 화강암에 산신도를 양각해 봉안했다. 경내에는 대불정주비각이 있는데, 이 안에는 1987년 월광사지 입구인 송계리 답147번지 논둑에서 발견된 대불정능엄신주비가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후기이며, 약 105자의 범문이 음각되어 있다. 고려후기에 성행하던 수능엄경에 있는 능엄주를 새겨 놓은 것으로 수능엄경의 내용은 불교수행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실천과정은 어떠해야 하며, 수행자들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경전이다. 본 능엄주는 제7권에 나오는 다라니로서 모든 마군과 외도를 항복 받고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범문으로 된 비문이 몇 점 있으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황해도 해주에 있는 대불정다라니당과 월광사지대불정주비가 유일한 것으로 국보급 문화재이다. 부도는 입적한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어 봉안한 탑으로 일종의 묘인 셈이다.
덕주사에도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뒤로 부도군이 있는데, 환적당, 부유당, 용곡당, 홍파당의 부도가 있다. 원래 서쪽 산기슭에 있던 4기의 조선시대 부도를 옮긴 것이다. 이 부도들은 대석 위에 둥굴게 돌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올리고 다시 그 위를 개석으로 덮은 형식을 하고 있다. 그 뒤 다시 창해당, 지암당 부도를 옮겨와 세웠다.
▲ 관음전 입구의 남근석들. 월악산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절 입구에는 남근석으로 불리는 돌 4기가 놓여 있다. 이 남근석의 조성은 월악산 험한 봉우리가 마치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는 형상과 같아서 음기를 누르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남근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남근석이 처음에는 월악산의 음기를 중화시키기 위해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며 아들을 바라거나, 소망과 행복을 추구하는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은 남근석의 형태를 보면 추측할 수 있다.
4개의 남근석 중 두 개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지만 나머지 두 개는 윗 부분이 거의 닳아 없어졌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남근석이 득남 기도처로 애용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곧 소원을 간절하게 빌면서 합장기도 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순수한 마음을 불심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월악산은 우리나라 삼천리 반도 수많은 산들 중 백두산 영봉과 함께 유일하게 영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다. 이름에 걸맞게 월악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린 산이다. 이런 월악산 영봉 아래 자리잡은 덕주사는 지금 고해의 바다에서 고뇌하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부처님의 법력으로 새로운 불사를 중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