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는 나의 두 번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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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나의 두 번째 아버지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5.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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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일가와 한 방 쓰며 10년을 산 정순자씨 자매
잇따른 낙선, 이희호 여사와 재혼 등 곁에서 지켜봐(2005년 5월 충청리뷰)

1958년 19살의 나이로 당시 이웃집 아저씨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에 병 수발을 하러 들어가 6년을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정순자(66)씨가 청주에 살고 있다. 정씨가 DJ 일가와 함께 사는 동안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후보등록 무효와 낙선, 첫 부인과 사별, 민의원 첫 당선, 이희호여사와의 재혼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보냈다.

정순자씨가 취업과 결혼 등을 이유로 김 전 대통령의 집을 떠난 뒤에는 김씨의 여동생인 이례(63)씨가 정씨의 뒤를 이었다. 이례씨도 김 전 대통령의 막내 홍걸씨를 업어 키우는 등 4년을 가족처럼 지냈으니 두 자매가 합쳐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DJ 일가와 함께 한 것이다.

청주로 시집을 와 살면서 김 전 대통령이 ‘빨갱이’로 매도되며 인구에 회자될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정씨는 지금도 김 전 대통령을 ‘두 번째 아버지’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가 송곳을 박을 여유도 없을 만큼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한순간도 자상함을 잃지 않았던 DJ 일가의 배려 속에서 정작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살가운 정을 나누며 살았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어 최근 불거진 ‘숨겨놓은 딸 파문’은 정씨에게 있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청주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정씨를 5월9일 서울 청량리에 있는 한 찻집에서 만나 묻어두고 살았던 50년 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담장 너머 살던 이웃집 아저씨
정씨에게 있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담장 너머 사는 이웃집 아저씨였다.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이 상경해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에 자리를 잡았을 당시 두 집안이 이웃해 살았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작고한 정씨의 아버지 정대언씨 역시 호남 출신인데다 김 전 대통령과 나이마저 같아 두 사람은 이웃사촌 이상으로 가까이 지냈고, 병치레를 하는 가족이 많았던 DJ 일가에서 병 수발을 도와달라고 청해오자 큰 딸 정순자씨를 흔쾌히 들여보낸 것이다.

당시 DJ 일가는 부인 차용애여사와 장남 홍일, 차남 홍업씨를 비롯해 어머니 장수금여사, 남동생 대의씨, 여동생 부미자(일본식 이름)씨 등이 3칸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었는데, 정씨는 홍일, 홍업 형제를 돌보면서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부미자씨에 대한 간병활동을 임무(?)로 맡게 됐다.

그러나 정씨 역시 추위를 몹시 타는 약골이어서 누구를 돌본다기보다는 자신도 보살핌을 받는 처지였다고 한다. 특히 여름에도 구들에 불을 때야 하는 상황이 종종 초래됐는데, 그럴 때에도 김 전 대통령은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으며 “네 녀석 때문에 내가 여름에도 뜸질을 한다”며 오히려 너털웃음을 웃었다는 것이 정씨의 회고담이다.

▲ 김대중 전대통령부부와 장남 홍일, 3남 홍걸씨의 가족사진,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정순자씨의 여동생 정이례씨.
해마다 이사,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정씨는 DJ 일가에서 머무는 6년 동안 마포구 대흥동에서 시작해 이대 옆 신촌시장 부근, 서대문구 대현동 등 일일이 장소와 순서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변인으로 일하게 된 1960년에 1,2층 독채 전세를 얻기 전까지는 정씨를 포함해 7식구가 방 3칸에서 생활했는데, 할머니와 여동생 부미자씨가 한 방을 쓰고, 동생 대의씨는 혼자 방을 썼으며 나머지 한 방에 정씨와 김 전 대통령부부, 아들 형제 등 5명이 새우잠을 자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정씨는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를 아랫목에 가로로 재우고 나머지 4식구가 윗목에서 세로로 잠을 잤다”며 자신을 한 식구처럼 배려해줬던 당시를 회상했다.

이 시기는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한 뒤 1958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하려다 등록무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9년 인제 보궐선거에서마저 낙선한 정치적 고난의 시기로, 살림도 궁핍하기 그지없어 정씨가 문밖을 나서면 약국이나 세탁소 등 인근 점포주들이 몰려나와 ‘외상값은 언제 갚아줄 거냐’고 하소연을 해 곤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차용애여사에 대한 가슴 저린 추억
정씨는 인터뷰에 응하는 동안 시종일관 눈가가 마르지 않았는데, 특히 1958년 8월에 사별한 김 전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 차용애여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차여사가 어린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장남 홍일씨의 누나 소희씨를 회상하며 정씨를 친딸을 대하듯 했다는 것이다. 차여사는 실제로 김 전 대통령에게 종종 “우리 순자를 큰 딸 삼자”고 말할 정도로 더없는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정씨는 두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내가 죽으면 너희들을 누가 돌보겠냐’며 “때때로 가슴 아픈 얘기를 하던 차여사의 쓸쓸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상한 뒤 특히 장남 홍일씨에 대해서 “남자가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지면 남에게 속기만 하는데 저 착한 눈을 어떻게 하냐”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심약하고 정이 많은 차여사였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외숙모가 원장으로 있는 종로구 낙원동 양재학원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억척스러움을 보였다고.

정씨는 또 차여사가 “자신이 찬장 위에 모아놓은 돈푼을 빌려달라며 부탁을 했던 적도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씨가 회고하는 차용애여사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목포 갑부의 딸로 영화배우 김지미와 닮은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었다는 것.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여름날 하얀 원피스에 꽃무늬 양산을 든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숨겨놓은 딸, 믿을 수 없는 얘기
정씨는 그러면서 최근 불거진 ‘김 전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파문’과 관련해서는 “그분의 성품과 행동거지를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누군가 흠집을 내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나타냈다.

차여사를 앞서 보내고 독신으로 3년을 보내는 동안 자식들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보인 자상한 아버지였는데, 이희호여사를 부인으로 맞이하고도 한눈을 팔았을 리 없다는 것이다. 정씨는 이 문제를 언론을 통해 접하며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말하는 남편과 입씨름까지 벌였다”며 김 전 대통령을 두둔했다.

정씨가 회상하는 김 전 대통령의 자상한 일면은 부인과 사별한 뒤 언제나 일찍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아 재웠던 안타까운 부성애로, 아이들을 재운 뒤 벽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기 시작하면 1시간이 훌쩍 흘렀다는 것이다.

이밖에 식구 수대로 병아리를 사서 아이들과 함께 기르고 강아지를 유난히 좋아했던 순수한 면모도 정씨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한마디로 말해 ‘높고 낮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정씨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내린 단답형의 평가다.

하나둘 떠나보낸 DJ 일가 사람들
정씨는 자신이 간병을 맡았던 김 전 대통령의 여동생 부미자씨나 어머니 장수금여사와도 육친의 정을 나눴는데, 김 전 대통령의 가계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부미자씨는 상당한 미인에 인텔리였지만 심장병으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고 한다.

부미자씨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운이 풀리지 않는다며 ‘미선’, ‘선옥’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작명하기도 했는데, 글 솜씨가 뛰어나 여성지에 문학작품을 내 당선되기도 했으며, 일기를 꾸준히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미자씨는 정씨가 영등포에 있는 공장에 다니기로 마음먹고 한 달 정도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정씨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 눈을 마주치는 순간 눈을 감았다고 한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 장수금 여사는 정씨를 친손녀처럼 감싸 다른 식구들로부터 핀잔을 들을 정도였는데, 김씨가 취업과 결혼으로 청주에서 살던 1972년 삶을 마감해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정씨의 가슴 속에 앙금으로 남아있다.

이밖에 김 전 대통령의 동생 대의씨는 정치의 후면에서 형을 뒷바라지 하다 대통령 당선 하루 전인 1997년 12월17일 간 질환으로 숨졌다.

똥도 버리기 아까운 내 아들
정씨가 DJ 일가를 회상하며 차여사 못지않게 강렬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DJ의 어머니 장수금여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네 어귀까지 나가 아들을 마중하며 정씨에게 “봐라, 우리 아들 온다. 길이 훤하지?”라고 말하던 것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는 것이다.

장여사는 ‘똥도 버리기 아까운 내 아들’이라며 아들 3형제 가운데 장남인 김 전 대통령에게 편애에 가까운 애정을 보냈는데, 김 전 대통령 또한 어머니의 말이라면 한 치도 거스름이 없었다고 한다.

정씨는 장여사가 입만 열면 아들 자랑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김 전 대통령이 하의도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감 장수에 얽힌 일화’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회고했다.

‘장여사가 일꾼과 함께 밭일을 하다가 감 장수의 봇짐을 머리에 이어주면서 자신과 일꾼, 아들의 몫으로 감 3개를 슬쩍(?) 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학교에서 돌아와 감이 생긴 연유를 물으며 맛있게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두엄 밭에 감을 뱉으며, 어머니와 일꾼을 크게 나무랐다는 것이다.

DJ를 신원보증인으로 연초제조창에 취업
정씨가 DJ 일가를 떠나게 된 것은 1965년 청주에 있는 연초제조창에 취업이 되면서부터다. “구멍가게를 내주든지 쓸만한 직장을 잡아 공을 갚을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누누이 말하던 김 전 대통령을 신원보증인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3년을 독신으로 지내던 김 전 대통령이 1962년 5월 이희호여사와 재혼을 해 1963년 11월 3남 홍걸씨를 출산한 뒤 1년여만의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씨의 난 자리를 메운 사람이 정씨의 친 여동생인 이례(63)씨라는 것. 이례씨는 정씨의 뒤를 이어 DJ 일가에서 홍걸씨의 유모 역할을 하는 등 4년 동안 생활하다가 역시 서울에 있는 연초제조창에 취업을 했으며, 지금은 원주에 살고 있다.

정씨는 생면부지의 땅인 청주로 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박동오(67)씨를 만나 이듬해 결혼식을 올리고 2000년 청주연초제조창에서 퇴임하기까지 40여년을 청주에서 살았다. 그러나 결혼 당시는 물론 그 후로도 한동안 남편마저도 DJ 일가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신이 DJ의 친척이라도 되냐
정치활동 규제와 도일, 미국 망명 등을 거듭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 속에서 충청도에 굳어진 DJ의 이미지는 오랜 동안 ‘적색(?)’이었다. 일터에서 작업 중에도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가 나오면 ‘빨갱이’이라는 힐난과 함께 성토의 장이 벌어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럴 때면 정씨는 화장실에서 혼자 울음을 터뜨리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때로는 분을 삭이지 못해 “신문에서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느냐”며 들이대기도 했는데, 돌아오는 말은 “네가 DJ의 친척이라도 되느냐”는 차가운 냉소였다고 회상했다.
이런 정씨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죄스러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20개월을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동안 옥바라지를 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연초제조창에 함께 근무하던 한 남자 직원이 지나가는 말로 “자기 형이 청주교도소에 근무하는데, 김대중씨가 한 달에 한 수레 분량의 책을 읽더라”는 얘기를 할 때는 너무 반가워 뒤를 쫓아가며 근황을 물었지만, 소극적인 성격 탓에 면회 한 번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민회의 대의원이 돼 청와대에서 해후
정씨는 수줍음이 유난히 많은 성격이지만 1997년 대선에 즈음해서는 김 전 대통령의 소속정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에 당원으로 가입해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또 1995년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정계에 복귀한 DJ가 2,3차례 청주를 방문했을 때에는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의 해후는 약 2년 뒤쯤 청와대에서 이루어졌다. 국민회의 중앙대의원을 맡은 정씨가 다른 대의원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하게 된 자리에서다. 정씨는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여사가 악수할 차례를 기다리며 먼발치에 서있던 자신에게 계속해서 눈길을 주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3시간여 동안 정씨는 때로는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한동안 풀이 죽어 말문을 잇지 못하는 등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지켜보는 저도 하루가 10년같이 힘들었는데 그 분들은 얼마나 더 힘들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오뚝이여. 100번 쓰러지면 100번 일어나’하며 입술을 앙다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언론에 불거진 작은 일면보다는 평생을 놓고 평가를 내렸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끝으로 정씨는 말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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