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꽃은 국악으로 피어난다. 아쟁소리에 개나리가 피어나고 가야금, 향피리 소리에 진달래, 철쭉이 붉은 울음을 터트린다. 개나리 마른 꽃대는 아쟁의 활이 되고 대나무 마디는 곧 퉁소나 피리의 재료가 됐으니 충청산하는 자연이 국악이요, 국악이 자연이다.

충북이 국악의 본고장이라는 점은 우륵, 박연 선생 등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중 2대 악성을 배출한데서 비롯된다. 우륵은 본래 가야국 사람이었으나 망국과 함께 악기를 들고 와 진흥왕에게 의탁하였다.

진흥왕은 그를 국원(國原:충주)에 머물러 살게 하고 대내마 주지(注知)와 계고(階古), 대사 만덕(萬德)에게 그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 이 때 만든 5곡은 신라 궁중음악이 되었다. 진흥왕은 국내를 순수하다 낭성에 이르러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며 우륵의 음악을 들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낭성이 청주의 낭성(娘城)인지는 불분명하며 하림궁의 위치 또한 청주인지, 충주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악학궤범에는 하림조(河臨調)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하림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듯 하며 하림조는 청풍체(淸風體)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청풍체는 청풍지방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림조의 하림이나 청풍체의 청풍은 충청민요의 음악적 특징을 나타내는 악조명이라는 해석이 타당성을 지닌다. (이창신, 국악의 본고장 그 정체성과 비전)

박팔괘는 1882년(고종 19)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에서 태어난 가야금산조의 명인이다. 그는 고종황제의 총애를 얻으며 어전 연주를 자주 했고 김창환, 한인호, 송만갑 등 당대의 명창들과 함께 미국 ‘빅터 콜럼비아’ 유성기 음반에 가야금 병창을 취입했다. 낙향한 뒤로는 지동근, 백점봉, 정해시 같은 후학을 길렀으며 청주극장이 개봉되면서 ‘박팔괘 연주회’가 열렸다.

박팔괘의 계보는 박상근, 성금연으로 이어지며 박상근과 동시대에 이일선, 이창수, 이계순 등 제자를 길러냈다.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으로 서울 무대를 휘 잡았으니 지방문화의 서울 점령이다.

판소리에는 흔히 동편제와 서편제만 있는 줄 아는데 그 사이에 충청도 판소리인 중고제(中古制)가 있다. 중고제는 동편제, 서편제와 다른 음악적 양식으로 19세기 중,후반 판소리의 큰 흐름을 만들어나갔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가 분명하며 음폭이 넓어 어지간한 성량으로는 중고제를 부르기 어려웠다. 반음을 쓰며 서편제보다는 동편제에 가깝다. 염계달(廉季達) 김성옥(金成玉)의 소리법제가 표준이며 김정근(金定根)-이동백(李東佰)-김창룡(金昌龍)으로 이어졌으나 맥락이 거의 끊겼다.

충주에서 출생한 염계달은 19세기 판소리 8명창의 한 사람으로 송홍록과 동년배다. 음성 어느 절 집에서 불목한이 노릇을 하며 10년 공부 끝에 명창이 되었다. 춘향가 중에서 ‘옥중갗를 잘 불렀다고 전한다. 정악이나 민속악, 판소리에 있어서 충북은 결코 타지방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그 후예들이 그러한 국악의 맥을 잘 전하지 못했지 때문에 일시적 낙후성을 보일 뿐이다.

요즘에는 청주,충주, 영동 등지서 국악 활동이 활발하다. 충주 교현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국악단 ‘해오름’을 창단했다. 남한강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던 우륵 선생이 1천5백년만에 부활한 것일까. 국악은 충북의 정체성 중 하나다. / 언론인·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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