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馬韓)으로 가는 길엔 이정표도 없다. 그 오랜 풍상이 역사의 이정표를 갈아내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마한은 지워져 버렸다. 역사의 미아, 마한은 부모산 일대와 LG 화학, 하이닉스로 통하는 제 3공단 외곽도로변 송절동에서 미로를 헤매고 있다.

신봉동 백제고분군은 3~5세기경 이른 백제의 지배자 무덤이다. 강력한 철기집단이 기존의 질그릇 마한 세력을 정벌하고 이룩한 철기 문화의 흔적이다. 이에 비해 송절동 원삼국 고분은 1~2세기 마한의 무덤으로 철기문화의 흔적 없이 질그릇 문화가 존재한다.

미호천이 이룩한 기름진 땅에서 토기를 빚으며 오순도순 살아가다 묻힌 선인들의 원삼국 고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신봉동과 또 다르다. 질그릇이 대체적으로 크며 입 모양이 나팔처럼 벌어져 있다.

관련학계에서는 연질토기와 경질토기의 편년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연질(와질)토기는 섭씨 8백도에서 굽는 토기이고 경질토기는 1천2백도에서 조성된다.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경질토기는 연질토기보다 더 단단하다. 일반적으로 경질토기는 연질토기를 구운 다음 발전된 형태로 보고 있다.

그런데 송절동 고분 출토토기를 보면 회청색 경질토기가 흑색이나 적색 연질토기와 함께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연질과 경질 토기 편년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원삼국 시대의 무덤은 삼국시대보다 훨씬 크다. 관(棺)도 크고 순장(殉葬), 뒤에 다시 묻는추장(追葬)의 흔적도 보인다. 무덤 둘레는 배수로로 파놓았다. 이를 ‘주구 움 무덤’이라 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에는 무덤을 조영할 때 산 능선을 따른 것이 아니라 무덤이산 능선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므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 주위에 주구(배수로)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가로 식’ 무덤이지만 이는 도참의 풍수지리설이 나오기 이전이란 점을 감안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백제의 전신인 마한은 54개 연맹체로 구성됐는데 그 수장(首長)을 목지국(目支國) 또는 월지국(月支國)이라 했다. 청주 부모 산에는 마한 연맹체의 하나인 아양국(我養國, 我讓國)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나 실증적 유물은 그곳에서 북쪽으로 한 발치 떨어진 송절동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아양국의 전설과 송절동 원삼국 유물 유적을 종합해 보면 청주에는 잃어버린 왕국 ‘마한’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충북도민의 노래 첫머리는 “역사의 혼이 깃 든 마한의 옛 땅...”으로 시작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청주만큼 마한의 실체가 뚜렷한 곳이 별로 없다. 신봉동에서 야산을 따라 송절동으로 이어지는 작은 산맥엔 마한의 비밀이 무진장 숨어 있다. 신봉동 백제고분은 사적으로 지정한데 이어 유물전시관까지 지어 놓았으나 송절동은 무방비 상태다. 충북대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기 전, 이미 수많은 고분이 도굴 당했다.

도굴 침을 맞은 마한의 둥근 토기는 깨지고 구멍이 나는 시련을 겪었다. 그 시련이 일시적이 아니라 툭하면 자행된다는데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한은 살아 있다. 진달래 꽃길을 따라 마한의 향취가 미호천으로 번져나가는데 우리들은 그 역사의 내음을 맡지 못하고 있다.
/언론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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