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개받침과 그 상면의 층단은 9단 내지 7단으로 되었고, 옥개는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지고 7층 옥개석 정상에 한 변 70㎝의 낮은 노반만이 남아있는데, 그 중심에 17㎝의 둥근 구멍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원공은 철주공으로 해석되는데 6층 옥신까지 미치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바닥면을 회로 발랐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경사가 심하여 보수를 위해 1967년 말 해체할 때 사리공으로 해석되는 것이 발견되었으나 내용물은 없었다. 단지 칠층 옥개 상면에서 꽃모양이 투각된 청동편이 발견되어 본래는 청동제의 상륜부가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해체 수리시 백자 종자 조각 여러 점, 금동편 3점, 금동불상 1점, 철편 3점, 사리장치 석재 1개가 발견되었다.
근처에 나이 어린 두 형제가 살았는데 동생은 날마다 이 연못에 와서 붕어들과 놀았다. 이에 샘이 난 형은 동생에게 붕어를 잡아오라고 했다. 동생은 싫다고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붕어에게 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붕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동생은 물 속에 끌려 들어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두 마리이던 붕어가 세 마리가 되어 다시 나타나 물 속을 헤엄쳐 다니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형은 이것을 잡아먹어 버렸다. 그랬더니 형 또한 죽고 말았다. 이 때부터 형이 살던 집 쪽으로 장수탑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지금 장락사가 들어선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장락리사지 모전석탑이 있는 자리로서, 이 탑 혹은 탑 주위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등의 유물로 보아서는 통일신라 당시 이곳에 큰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모전석탑이 세워졌던 절이나 모전전탑 자체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하나도 없어 사찰이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그 유래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절터만 남은 이곳에 송학산 강천사에서 수도하던 법해 스님이 1967년부터 머무르면서 불사를 일으켜 1971년에 법당을 완공하고 지금의 장락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법해스님이 1973년 2월 9일에 열반하자 그해에 성원스님이 주석하면서 관음전을 짓고 관음보살입상을 봉안했다.
현재는 1992년부터 혜원 주지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1971년에 완성되었으며, 1993년에 중수되었다. 안에는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이 좌우로 협시한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은 1993년에 지었는데 관음보살을 법당 안에 모시지 않고 건물 바깥에 세워 관세음보살입상을 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동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 관음보살상은 1984년에 조성된 총높이 4.56m의 입상이다. 팔각형 기단 위에 두 개의 연화대를 받치고 그 위에 높이 2.86m되는 관세음보살입상을 모셨다.
모전석탑이 세워졌을 당시의 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부근에 예로부터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온다. 제천시 교동 고개를 넘으면 정거랭이(현 장락동 일대) 벌판이 펼쳐지며, 이 정거랭이 오른쪽 사방 오리가 옛날 통일신라시대 선덕왕 재위 시절의 절터였다고 전해온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관세음보살입상. 법당 안에서 관음보살상을 보며 기도할수 있도록 벽면을 우리로 만들었다.
곧 지금의 장락리 모전석탑이 자리한 부근으로서, 그 가운데 하나가 창락사라고 하는데, 창락사가 장락사지 모전석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이 절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오보마다 석등이요, 십보마다 불상이고, 백보마다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당에서 절골까지 5리 사이에 회랑이 이어져 있어 승려들이 눈비를 맞지 않고도 수도했다 하며, 사월 초파일과 칠월 칠석날이면 3,000여 명의 승려가 목탁과 바라를 치고 법요식을 거행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칠층 모전석탑과 근래에 조성된 장락사만 있을 뿐 그 예전의 번성했던 절집은 그 형태조차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