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2> - 제천시<5>

▲ 칠층모전석탑. 보물 제 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천시 장락동 64번지에 있다. 제천 시내에서 영월방면 국도로 1㎞ 정도 나가면 철도와 국도가 나란히 달리는데, 거기에서 8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장락동이 있다. 이곳을 지나 태백선 철도를 넘으면 장락동 마을회관이 보인다. 이곳에서 농로를 따라 한참을 더가면 사과 과수원 사이에 탑과 장락사 절집이 보인다. 칠층모전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탑으로 얼핏 보면 벽돌처럼 보이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회흑색 점판암을 벽돌처럼 잘라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높이는 9.1m이고 기단은 단층으로 여러 개의 자연석을 쌓아 탑신부를 올렸다. 이 탑의 1층 부분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네 모퉁이에는 높이 137㎝, 너비 21㎝의 화강석주를 세웠는데, 이러한 수법은 다른 전탑이나 모전석탑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수법이다. 또 남북 양면에는 화강암으로 문주 둘을 세우고, 미석을 얹어 방곽을 만들고 문비를 달고 있는데 남면의 것은 상실되었다.1층 탑신의 남북에는 감실을 마련했다. 초층 탑신의 높이는 네 모퉁이의 방주와 같고 너비는 2.8m이다. 지금은 동서 양면에 극심한 피해를 입어 탑재가 탈락되어 있는데, 이러한 피해는 2층 옥개석까지 미치고 있다. 옥개는 상하 모두 층단을 가진 전탑 특유의 형태를 하였고 추녀도 단축되었다. 추녀는 수평으로 평평하고 얇으며 층마다 모서리에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있고, 7층에는 풍경을 달았던 철제고리가 남아있다. ▲ 칠층모전석탑과 장락사 원경
옥개받침과 그 상면의 층단은 9단 내지 7단으로 되었고, 옥개는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지고 7층 옥개석 정상에 한 변 70㎝의 낮은 노반만이 남아있는데, 그 중심에 17㎝의 둥근 구멍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원공은 철주공으로 해석되는데 6층 옥신까지 미치고 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바닥면을 회로 발랐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경사가 심하여 보수를 위해 1967년 말 해체할 때 사리공으로 해석되는 것이 발견되었으나 내용물은 없었다. 단지 칠층 옥개 상면에서 꽃모양이 투각된 청동편이 발견되어 본래는 청동제의 상륜부가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해체 수리시 백자 종자 조각 여러 점, 금동편 3점, 금동불상 1점, 철편 3점, 사리장치 석재 1개가 발견되었다.

▲ 측면에서 바라본 탑의 1층. 모전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부근을 지표 조사한 결과 선조문 평기와 3점, 어골문 평기와 1점, 복합문 평기와 1점, 무문평기와 2점이 발견되었고, 토기 구연부편 1점, 토기 동체부편 3점 등도 발견되었다. 제천시 장락동은 본래 제천현 현좌면 지역으로 ‘창락’, ‘정거분’, ‘정거여’, ‘정거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창락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창락사가 어떤 절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일명 장수탑, 또는 장락탑으로 불리기도 하는 칠층모전석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장락리에 아주 나이가 많은 스님이 탁발을 왔다. 그런데 한 집주인이 심술궂게도 곡식 대신 모래를 퍼주었다. 옆에서 이곳을 본 이 집 젊은 며느리가 스님을 쫓아가서 쌀을 주면서 시아버지의 무례를 용서해 줄 것을 빌었다.노승은 며느리에게 얼른 자리를 피하라고만 이르고 홀연히 가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며느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별안간 천지를 뒤흔드는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심술궂은 사람의 집은 탑으로 변하고 착한 며느리는 돌로 변하였다. 그런데 탑 옆에는 큰 못이 생기게 되었고, 못 속에는 붕어 두 마리가 살게 되었다. ▲ 탑신에 있는 감실.
근처에 나이 어린 두 형제가 살았는데 동생은 날마다 이 연못에 와서 붕어들과 놀았다. 이에 샘이 난 형은 동생에게 붕어를 잡아오라고 했다. 동생은 싫다고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붕어에게 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붕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동생은 물 속에 끌려 들어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두 마리이던 붕어가 세 마리가 되어 다시 나타나 물 속을 헤엄쳐 다니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형은 이것을 잡아먹어 버렸다. 그랬더니 형 또한 죽고 말았다. 이 때부터 형이 살던 집 쪽으로 장수탑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지금 장락사가 들어선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장락리사지 모전석탑이 있는 자리로서, 이 탑 혹은 탑 주위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등의 유물로 보아서는 통일신라 당시 이곳에 큰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모전석탑이 세워졌던 절이나 모전전탑 자체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하나도 없어 사찰이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그 유래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절터만 남은 이곳에 송학산 강천사에서 수도하던 법해 스님이 1967년부터 머무르면서 불사를 일으켜 1971년에 법당을 완공하고 지금의 장락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법해스님이 1973년 2월 9일에 열반하자 그해에 성원스님이 주석하면서 관음전을 짓고 관음보살입상을 봉안했다.

현재는 1992년부터 혜원 주지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1971년에 완성되었으며, 1993년에 중수되었다. 안에는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이 좌우로 협시한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은 1993년에 지었는데 관음보살을 법당 안에 모시지 않고 건물 바깥에 세워 관세음보살입상을 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동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 관음보살상은 1984년에 조성된 총높이 4.56m의 입상이다. 팔각형 기단 위에 두 개의 연화대를 받치고 그 위에 높이 2.86m되는 관세음보살입상을 모셨다.

모전석탑이 세워졌을 당시의 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부근에 예로부터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온다. 제천시 교동 고개를 넘으면 정거랭이(현 장락동 일대) 벌판이 펼쳐지며, 이 정거랭이 오른쪽 사방 오리가 옛날 통일신라시대 선덕왕 재위 시절의 절터였다고 전해온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관세음보살입상. 법당 안에서 관음보살상을 보며 기도할수 있도록 벽면을 우리로 만들었다.
곧 지금의 장락리 모전석탑이 자리한 부근으로서, 그 가운데 하나가 창락사라고 하는데, 창락사가 장락사지 모전석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이 절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오보마다 석등이요, 십보마다 불상이고, 백보마다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당에서 절골까지 5리 사이에 회랑이 이어져 있어 승려들이 눈비를 맞지 않고도 수도했다 하며, 사월 초파일과 칠월 칠석날이면 3,000여 명의 승려가 목탁과 바라를 치고 법요식을 거행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칠층 모전석탑과 근래에 조성된 장락사만 있을 뿐 그 예전의 번성했던 절집은 그 형태조차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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