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碑文)이 사열하는 청주역사 1번지 <임병무>

중앙공원  청주시 남문로 2가 92번지에 있는 청주 중앙공원은 1천3백여년 동안이나 청주의 노른자위 역할을 해온 청주역사의 산 증인이다. 여기서 말한 '노른자위'  란 중심지라는 의미와 더불어 역사의 축에 서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도시가 사방, 팔방으로 발달하여도 '명동' 은 역시 '명동' 일 수 밖에 없다.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듯 청주는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했고 신문왕 9년(689)에는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원경성의 치소(治所:행정의 중심지)가 어디냐에 대해선 학설이 구구하다.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청주읍성설 등이 얽혀 있는데 보편적으로 학계의 폭넓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청주읍성설이다.

서원경성의 치소가 청주읍성이 확실하다면 그곳은 고대 청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온 역사의 파수꾼이리라. 설사 서원경성의 치소가 아니었다해도 나말여초(신라말 고려초)부터는 명실공히 청주의 자방(子房)역할을 해왔다.

 국보 제 41호인 용두사지 철당간은 '용두사' 라는 절 입구에 있던 불기(佛旗)게양대이다. 나말여초의 사찰로 추정되는 용두사는 어디로 가고 절 입구를 지키는 철당간만이 외롭게 남아있다. 당시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황룡사, 분황사처럼 절이 도시의 중심에 들어서는 예가 흔하였다. 그리고 절 이름중에 용(龍)자가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사찰의 규모가 크다.

▲ 수령 800년의 압각수는 충신들을 구해 낸 사연을 간직한 중앙공원 터줏대감이다. 지난 70~80년대 용두사지 일대와 중앙공원으로 통하는 하수도 공사과정에서 거북좌대 등 나말여초의 불교 유물이 여러점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용두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유물로 여겨진다.고려시대, 중앙공원은 읍성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 효종 2년(1651)에 충청병영이 충남 해미(海美)에서 청주로 옮겨왔는데 그 장소가 다름아닌 현재의 중앙공원이다.중앙공원 한 가운데있는 압각수(鴨脚樹)라 불리는 수령(樹齡) 8백년의 은행나무는 청사(靑史)를 굽어보는 공원의 터줏대감이다. 충북도 기념물 제 5호로 지정돼 있는 이 압각수에는 역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에는 이 은행나무와 물난리에 대한 고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고려 공양왕 2년(1390) 5월에 있었던 일이다. 청주목의 객사문 주변에는 수십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다.그 은행나무 가운데 압각수라 불리는 이 은행나무는 옥사(獄事)와 물난리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의 반대파로 지목된 상당수의 학자, 정치인이 청주옥에 갇혔었다. 이색(李穡), 권근(權近), 이림(李琳), 변안렬(邊安烈), 이인민(李仁敏), 정지(鄭地), 이숭인(李崇仁), 이종학(李鍾學), 이귀생(李貴生) 등이 그들이다.조정에서는 윤호(尹虎), 박경(朴經), 이확(李擴), 신효창(申孝昌), 전시(田時) 등을 보내어 관찰사 유구와 함께 국문케 하였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며 큰 비가 내려 냇물(무심천)이 크게 불어났다. 냇물은 읍성의 남문을 허물며 곧바로 북문으로 나가니 성안은 물바다가 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떠내려가게 되었다. 옥관(獄官)들은 허겁지겁 나무에 올라가 수재(水災)를 면하게 되었다. 이색 등도 압각수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한다. 조정에서는 이들이 죄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하여 다음달 조온(趙溫)을 보내 가둔 사람을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죄수 150명도 풀어 주었다 한다.동국여지승람에는 공민왕때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에 의해 공양왕 2년, 5월 을사(乙巳)일 임이 확인된다. 이 일이 있은후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한 시 한수를 남겼다. [流言不幸及周公/ 忽有嘉禾偃大風/ 聞道西原洪水長/ 是知天意古今同. 근거없는 소문으로 주 무왕의 아우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네/ 청주에 큰 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하늘의 뜻이 예나 이제나 같음을 알았도다]압각수라 불리는 이 은행나무는 은행잎 모양이 오리발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필자의 견해는 좀 다르다. 세상에 은행나무잎치고 오리발처럼 생기지 않은 은행나무잎이 없다. 따라서 이 은행나무는 잎 모양 때문에 압각수라고 칭한게 아니라 뿌리가 오리발처럼 넓고 깊게 박혀 지어진 이름같다. 압각수의 다리각(脚)자를 쓴 것으로 보아도 잎이 아닌 뿌리모양새에서 연유된 듯 하나 그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다.물난리와 고려말의 정치상황을 말해주는 이 은행나무는 8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을이 오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지난 90년대 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을 때 중앙공원의 대표적 배경이 되는 역사의 나무였다. 이만수, 손창구씨 등 중앙공원의 사진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카메라가 귀하던 70~80년대까지만 해도 중앙공원에는 여러 명의 사진사가 있었다. 결혼, 약혼은 물론 졸업사진, 돌 사진에 이르기까지 중앙공원은 기념사진의 단골 배경이었다. 사진관에 가서 찍는 것보다 사진 값이 다소 헐한 것도 이곳을 찾는 이유중의 하나였다.청주 근대사와 더불어 반세기이상 부침하던 공원의 사진사도 카메라의 폭넓은 보급과 더불어 상업성을 잃고 퇴진한 것이다. 이곳에서 사진도 찍고 시민관에서 영화도 보던 추억이 빛바랜 앨범처럼 청주시민 모두에게 남아 있다. 중앙공원은 청주의 비림(碑林)이다. 비림이란 중국의 고도, 서안에 있는 것을 일컫는데 고대 중국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비문을 모아 두었다. 비(碑)가 숲(林)을 이루고 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 임진란 때 청주성 찰환의 주역의 전공을 기리는 중봉 조헌, 영규대사, 화천당 박춘무의병장 기적비

청주역사, 문화의 1번지인 만큼 중앙공원에 비문이 집합돼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곳에는 임진란 당시 청주성 탈환의 주역이었던 중봉(重峰) 조헌(趙憲)선생의 기적비(紀蹟碑)를 비롯하여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대사의 기적비, 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선생의 기적비가 오른쪽 편에 줄지어 있다. 

1974년 건립한 영규대사 기적비와 1988년에 건립한 박춘무 의병장의 기적비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이나 숙종 36년(1710)에 해세운 조헌선생 기적비는 뒤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는데다 곰팡이가 슬면서 글자를 좀먹고 있다.

이외에도 목사 서유민 선정비(牧使 徐有民 善政碑), 김효성 청백 선정비(金孝誠 淸白 善政碑)가 공원 화단 오른편에 있고 판독이 불가능한 선정비도 1기 있다. 거북좌대위에 세운 김효성 선정비는 '이수'까지 갖추었다. 비신위에 용머리 장식이 있으면 '이수' 라고 하고 용머리장식이 아닌 덮개돌 형식이면 개석(蓋石), 비갓, 갓돌 등으로 불린다. 선정비의 이수 전후면에는 용조각이 현란하다.

▲ 청원군 북일면 출신의 의병장 한봉수 송공비. 상당공원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담장 가까이에는 돌거북 좌대 1기가 있는데 중앙공원 후문 일대의 하수도 공사도중 나온 것으로 보인다. 돌거북의 형태는 희미하나 비신(碑身)을 세웠던 흔적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중 하나는 귀부(龜趺:머리부분)가 약간 고개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통일신라시대, 국운이 한창 융성할 때 만든 비석의 귀부는 고개를 정면으로 치켜들고 비상이라도 할 듯 포효하는 모습이나 국운이 쇠퇴할때는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 고개를 틀고 있는게 비석의 일반적 형태다. 따라서 이 이름없는 거북좌대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아니고 신라말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다.중앙공원 후문쪽으로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 송공비가 있다. 이 비석은 당초에 전면 비문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비문의 내용을 '의병장'으로 할 것인가 '의병대장'으로 할 것인가 난상토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을미사변후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봇물처럼 터졌는데 그중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인석과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신돌석이 대표적이고 청주지역에서는 한봉수를 꼽게 된다. 청원 북일면 세교리가 고향인 한봉수 선생은 왜병에게 치명적 타격을 여러번 가했고 청주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그러나 당시의 의병은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그 리더도 ;의병대장'이 아닌 '의병장'이 맞다고 본다. 송공비를 건립할 당시 이를 높여 '의병대장'으로 새겼다가 추후에 '의병장' 으로 바꾸어 비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하수도 뚜껑으로 쓰이다가 옮겨온 척화비
세월이 흐르자 비신 안에 숨어있던 당초의 글자가 다시 새긴 글자와 중첩되며 떠오르는 통에 비문이 매우 흉하다. 언젠가는 다시 각자를 하든지,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개화의 물결이 소용돌이 칠 때 해 세운 척화비(斥和碑)도 빼놓을 수 없는 중앙공원의 비석이다. 본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1976년 2월20일 정찬일씨가 석교동 92~12, 신충구씨의 집앞 길가 하수도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중앙공원으로 옮겨놓은 것이다.(청주읍성복원 학술조사보고서)

비신은 절단된 상태로 높이 95cm, 폭 46cm, 두께 19cm이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할 당시에 발생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응징하기 위해 만든 척화비중의 하나다. 비문내용은 양이침범비전 즉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 則主和賣國) 등인데 중앙공원의 척화비는 양이(洋夷) 즉주(則主) 등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풍상에 깎이는데다 무분별한 탁본 등으로 글자가 많이 훼손된 상태다.

근대사, 현대사의 궤적도 중앙공원에는 많이 남아 있다. 중앙공원 중심부에는 단기4282년(서기1949)에 해세운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있다. 거북좌대 위에 분수를 곁들인 이 비는 '칠만 시민 일동' 이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칠만 인구가 오늘날 60만으로 거의 10배 가량 늘어났으니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4.19 직후인 1961년, 중앙공원 향나무 아래에 '4.19 의거비'가 있었으나 이듬해 5.16이 발생하자 4.19 의거비는 종적을 감추었고 그 주변에 5.16 기념비가 들어섰다. 그 비석도 민정이 실시되자 중앙부위에서 슬그머니 청주문화관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 대한민국 독립기념비 중앙공원 서쪽으로도 비문이 많은데 대부분 작금에 세운 비이다. 청주향약비를 비롯하여 시계탑, 사회단체 기념비, 청주시민의 노래비(이은상 작사, 오동일 작곡),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청주시민헌장 등이 곳곳에 서 있다. 모름지기 비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충청병영의 어떤 캐릭터를 살리지 못하고 난삽하게 널려있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충청병영이 있던 이곳에는 병영을 경영키 위한 건물이 꽤 많았다. 병마절도사의 처소인 청진당(淸塵堂), 도서실격인 후당(後堂)과 반시당(反始堂), 병사의 집무소인 운주헌(運籌軒), 지휘소인 통군루(統軍樓) 등 수십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지난날 청녕각(淸寧閣)현판을 잘못 달고 있던 병마절도사 영문(兵馬節度使 營門) 한 채만 남아 있다. 병마절도사 영문은 원문(轅門)이라고도 불렀다.그 원문의 현판 이름은 정곡루(正鵠樓)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충청병영(중앙공원)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지금은 중앙공원의 정문이 남쪽에 있지만 병마절도사 영문은 동향을 하고 있다.따라서 충청병영엘 들어가자면 우리은행쪽에서 서행을 하여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중앙공원 정문쪽에서 보면 과거 청녕각 현판이 걸렸던 곳은 건물의 동쪽이다. 청녕각 현판이 원래의 자리인 청주목 동헌으로 옮겨간후에도 주련(기둥 글씨)과 문화재 안내판이 동쪽에 배치돼 있다. ▲ 충청병마절도사영문과 유적탐방을 온 어린이들
물론 시민의 눈에 잘 보이도록 배치한 것으로 보이나 건물의 구조상 앞쪽으로 옮기는 것이 올바른 배치다. 충청병영은 크게 봐서 3차례 정도 역사의 상처를 입었다. 그 첫째가 임진란이요, 둘째가 이인좌, 신천영(李麟佐, 申天永)의 난이며 세 번째가 일제에 의해 청주읍성 자체가 허물어졌다는 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는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삼남의 요로인 청주성을 점거하였다. 흑전장정(黑田長政) 휘하의 부장인 봉수하가정(峰須賀家政)은 약 1만여명의 군사를 이곳에서 주둔시켰다. 이에 방어사 이옥(李沃)이 이끄는 관군과 조헌 선생의 의병, 영규대사의 승병이 빙고재(현 모충동 고개)에 진을 치고 왜적과 일전을 겨뤘다.

의병은 서문을 주로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자 남문, 북문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주력부대는 역시 서문을 공격하여 왜병을 물리쳤다. 이때 성문밖으로 탈출한 한 여인이 "왜군은 야간 기습공격을 두려워하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하였다. 이에 의병, 승병은 있는 힘을 다해 청주성을 탈환했는데 이때 관군보다 오히려 의병, 승병이 더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영조 4년(1728)에 있은 이인좌의 난은 당파싸움에 연루된 변란이었다. 소론파가 노론파를 몰아내기 위한 난이었다. 이인좌와 정희량(鄭希亮) 등은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옹립하려고 영남에서 모반하였다. 그후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이인좌의 난은 '이인좌, 신천영'의 난으로 불리고 있으며 특히 청주지방에서는 그냥 '신천영의 난'으로도 불린다.

이인좌, 신천영은 청주성을 함락하는데 ꡐ트로이의 목마ꡑ같은 작전을 썼다.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에 입성하여 병영을 기습했다. 병영에서는 비장, 양덕부(梁德溥)가 난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슬그머니 열어 주었다. 이통에 병사 이봉상(李鳳祥), 비장 홍림(洪霖), 영장 남연년(南延年) 등 수많은 장수와 병졸이 전사하였다. 이 난이 진압된후  조정에서는 삼충사(三忠祠)를 지어 세 장수의 충절을 기렸는데 조선 말기에 삼충사는 수동으로 옮겨져 표충사(表忠祠)라 부르고 있다.

▲ 1920년대 중앙공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1908년, 충북도청(관찰부)은 충주에서 청주로 옮겼고 청주읍성은 퇴락하였으나 관찰부의 부성(府城)역할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주성과 성내 관아건물들은 제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성을 허물어 그 성돌로 하수구를 쌓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1천3백여년 고도 청주를 보듬어온 청주읍성은 이로써 종말을 고하고 청주목 동헌인 청녕각과 더불어 병마절도사 영문, 망선루, 용두사지 철당간 등 몇점의 문화재만 간신히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2002년 건립된 천주교 청주지역 순교자 현양비
1921년, 망선루는 제터인 구 청주경찰서 무덕관을 떠난 뒤 제일교회안에 숨죽여 있다가 지난 2000년 고향초입인 중앙공원 북쪽편에 복원하였다. 2002년 9월에는 천주교 청주순교자 현양비가 공원 남쪽에 세워졌다. 1799년 순교한 원시보 야고보를 비롯한 4명의 청주지역 순교자를 기리는 돌로 앞머리에는 '순교자현양'이라 각자했다.

앞으로는 현 청원군청 뒤편에서 외롭게 서 있는 청주목 동헌과 중앙공원을 연계시켜 이른바 '관아 공원'을 조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청주 중앙공원은 시민의 단순한 휴식처 뿐만 아니라 역사 관광을 겸한 향토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본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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