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선을 필두로 경부선, 충북선 등 한반도에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은 한반도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만주 침략을 위한 일제의 물자수송 동맥선 구축에 있었다. 충북선도 그런 맥락아래 태동되었다.

당초 충북선의 기점은 부강 역이 검토되었고 충북선 개설을 둘러싼 공방전 및 로비도 치열하였다.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의 청주연혁지에는 ‘마쯔키(松木) 등은 동경(東京)의 부호들을 설득, 충북선 철도를 건설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근진(根津) 등 유력자의 찬성을 얻어냈다’고 기록하며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자본금 1천만 원으로 충북경편철도주식회사(忠北輕便鐵道株式會社)를 창립하고 총독부에 이를 출원하였다. 이 회사의 계획은 부강을 기점으로 하여 충주에 이르는 것을 1기, 충주에서 제천간을 제 2기로 삼았다.

그러나 중앙철도회사(中央鐵道會社)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중철은 급하게 청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그 하나는 조치원을 기점으로 하여 청주~음성에 이르는 선이고 또 하나는 성환을 기점으로 하여 장호원~충주에 이르는 선이었다.

충북은 충북도와 다른 안을 낸 중철의 계획에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결국 이 싸움은 중철의 승리로 끝나면서 조치원을 기점 역으로 하는 충북선 안이 채택되었다. 충북은 자존심이 상하였으나 부강 역을 기점으로 하든, 조치원 역을 기점으로 하든 큰 영향은 없었기 때문에 수그러들었지만 부강 주민들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다. 1920년, 청주~조치원간 철도공사가 착수되어 경부선에 동맥을 이었는데 철도의 너비가 만철(滿鐵)과 같은 광 궤도였다. 궤도를 만주철도와 같게 한 점만 보더라도 침략의 통로 개설을 짐작할 수 있다.

1921년, 청주~조치원간 개통을 본데 이어 1923년에는 증평까지 연장공사를 마쳤고 그 축하모임을 그 해 5월 1일 청안 역에서 가졌다. 청주~조치원간은 1일 4회 운행하다 5회로 늘어났고 청주~청안 간은 4회를 왕복하였다. 1928년에는 충주까지, 1958년에는 제천시 봉양읍까지 연장되었고 1980년 복선화에 이어 이번에 전철화 된 것이다. 충북선을 달리던 열차는 초기 증기기관차에서 1967년 디젤 기관차로 바뀌었다.

연기를 하늘로 내뿜는 증기기관차의 기적(汽笛)은 아련한 향수다. 그 기적을 들으면 옛 사람이 생각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감마저 든다. 그래서 봄만 되면 우물가의 순이, 영희가 봇짐을 싸들고 중앙시장 옆 청주 역으로 모여들었다. 현 청주대교는 철교가 있던 자리이고 거기서 상당공원 앞을 거쳐 왼쪽으로 꺾어드는 간선도로는 철길이 있던 자리다. 수동 천주교회 앞, 철로 변에는 연탄공장이 즐비했고 수아사 뒤편으로는 건널목(일본말로 후미끼리)이 있었다.

시내를 한바퀴 돈 열차가 서청주 구릉지대를 올라갈 때면 거북이 걸음에 늑골을 앓았고 발빠른 기차통학생들은 이때다 싶어 열차에 올라탔다. 충북 선이 외길일 때는 조치원~제천간 운행시간이 6~7시간이었고 연발, 연착을 밥먹듯 했기 때문에 승객에게는 열차 시간표가 있으나 마나 였다.

철길 따라 걷던 재건 데이트의 추억이 기억의 저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 언론인 ·향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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