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가지 직업병 증세를 갖고 있는데, 자세한 증상은 아래와 같다.
▶증상 1 (시민동원 증후군) 결혼식장이던 영화관이던 사람이 적으면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댄다. 심지어 월드컵 경기장에서 조차 비어있는 관중석을 바라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싶었다. 빨리 나오라고... 브라질팀이 경기하는데, 자리가 비었다고...
▶증상 2 (참여의식 증후군) 16강 진출로 붉게 물든 한반도와 함께 대.한.민.국.!을 정신없이 외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왜 투표를 안했을까? 나조차 신물나고, 정나미 떨어진 정치판이지만 그래도 시민들의 참여없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붉은 물결에 취해 춤을 추다가 사람들이 점점 사회참여를 회피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증상 3 (살아남은자의 우울증) 4강 진출의 기쁨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 온 몸을 감싸안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버스위로 올라가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보자니, 왜 광주민중항쟁이 생각나 울컥이는걸까? 신군부의 학살에 맞서 수백대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 가, 나- 가, 도청을 향해’ 피를 토해내며 외치던 젊은이들... 아! 살아남은 나는 저 젊은이들의 열정이 축구 뿐만아니라 제발 세상을 바꿔나가는 열정도 되었으면 하다보니, ‘축제’를 온 몸으로 즐기지도 못한다.
‘여성’이라는 성정체성은 자연스레 나로하여금 여성운동을 택하게 했다. 세상을 바꾸고 상처받은 역사를 치유할 힘이 빛의 우주를 연 가이아 여신, 우리 여성들의 자궁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천년 여성의 현실은 어떠한가. 호주제는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서 친자를 여성의 호적에 올릴 수 없고, 정리해고 1순위는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또한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의 정치진출 또한 기대 이하이니, 철옹성처럼 견고하기만한 사회현실에 낙심할만하다.
또 참여에 무관심하고, 자신이 가진 것조차 나누려들지 않는 냉소적인 시민들이 지역사안이 발생했을때마다 “도대체 NGO는 뭐하는거냐!”고 호통치는 전화를 받으면서 많은 좌절을 겪기도 했다. 도대체 시민들의 참여없이 어떻게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이렇듯 간절한 시민참여에 대한 소망은 냉소적인 시민들에 대한 원망으로, 시민동원에 대한 압박감으로 바야흐로 직업병을 낳았던 것이다. 또 평등·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내던진 나의 삶이 어제 그토록 원하던 열사들의 ‘내일’이었음을 기억하기에 나의 직업병은 ‘시민참여’외에는 ‘약’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되묻는다. 혹시 이루어낸 성과만큼이나 쌓여만 가는 업무 속에서 우리 NGO 활동가들은 기지개조차 맘껏 펴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은 아닐까? 햇빛은 구경조차 못하면서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아래에서 감성을 눌러가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우리 내부에도 독버섯처럼 자라난 보여주기식의 성과주의가 결국은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해 온 활동가들을 병들게 하고 때론 지쳐버린 심신으로 떠나가게 하지는 않았던가. 활동가 자신의 삶이 진정 자유롭고, 활기롭지 못하다면 도대체 무엇이 소중한 가치란 말인가?
정녕 달라져야겠다. 우리의 운동이 삶을 축제로 만들기 원한다면 활동가들의 삶부터 행복해져야겠다. 무엇보다 방대한 사무실의 업무를 하나씩 줄여나가고 ‘시민참여’라는 ‘일’이 아닌 다양한 만남 속에서 냉소적인 시민들, 그 마음의 밭을 일구어 ‘희망의 씨앗’이 자라도록 밭을 가는 이가 되어야겠다. 고속도로를 내달리듯 세상을 빨리 바꾸고 싶은 마음, 역사에 대한 책무의식과 살아남은 이의 우울증에서 한 발 물러서 오솔길 사이로 피어난 작고 예쁜 이름없는 꽃들에게 눈길을 주며 감성·영성·이성을 잘 버무려 ‘따뜻하고 열린 마음’을 이웃에게 선물하고 싶다. 나의 ‘직업병’조차 ‘우주와 세상, 사람’을 품어안는 연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이 땅의 여성운동가로 활동가로 산다는 것은 끝없이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며,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인드라의 그물망을 열어가기위한 끝없는 구도여행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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