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꽃 (청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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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꽃 (청남대에서)
  • 육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05.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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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유월! 조국을 지키고자 목숨 잃어 간 미망인들의 눈물인 듯, 청남대 가는 길 양옆으로 망초 꽃이 하얗게 피어나 바람결에 시름을 달래고 있다. 나라를 수호 하고자 했던 젊은 영령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음을. 이렇듯 시간은 어떤 기대에 대한 하나의 믿음이기도 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내 시간의 터널 속에서 나는 지금 이 나라 대통령의 별궁이었던 청남대로 향하고 있다.

평범한 한가정의 가장노릇도 쉽지 않은데 일국의 살림을 꾸려가는 어버이 노릇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나라 살림 꾸리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고저 가끔 다녀가던 곳이다. 이 나라 국민들이라면 궁금했을 어버이의 집을 두고 사람마다 각자의 시선과 잣대로 오랜 시간 말들도 많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던 곳이었는데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 있어 무엇을 변화시키기 위해, 또는 보다 나은 것으로 발전되기 위해 많은 시간들이 꼭 필요하다. 우리 일행은 청남대를 자유롭게 돌아 보기위해 모든 관람이 끝난 후 다시 만날 시간을 정해 놓고 시침과 분침처럼 각자의 속도로 움직였다.

초록 색실로 수를 놓은 듯한 잔디밭엔 막 이발을 마친 듯한 소나무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서 있다. 어디 소나무뿐이랴! 잡풀 하나 허락 되지 않는 정원을 보고 있으려니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제 마음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 나는 입고 있던 티셔츠의 목 단추를 따놓았다. 바람도 마음 놓고 불어 댈 수 없을 것 같은 정원에 서있는 소나무들이 마치, 군복을 입고 부동자세로 그 곳을 지키고 서 있었던, 우리들의 아들들인 양 안타까운 마음에 살며시 안아 주었다.

골프장APRON(그린의 입구를 말하는 것으로 잔디를 가지런하게 다듬은 구역)에서 서로의 어깨를 부비 던 잔디는 여린 풀 냄새로 내 코끝을 간질이더니 살살 이는 바람에 일제히 들어 누워 이제야 겨우 마음 놓고 깔깔댄다. 절제된 공간을 벗어 난 후련함 때문인가?

오만여 평의 너른 대지엔 갖가지의 나무와 꽃들이 말없이 나름의 모습으로 곧고 바르게 또는 운치 있게 사랑스럽게 멋지게 피고 지고 있었다. 대 저택의 정원 한 구석에서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는 시계 꽃이 나를 유혹 했다. 언뜻 보기에 그 분들의 시절만큼이나 화려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화려함이 야하지 않고 어딘가 지적인, 아니 절제 된 듯한 화려함이 오히려 세련미를 더 했다. 이렇듯 세상은 살아있어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꽃의 모습이 시계를 닮아 있어 시계 꽃이라 불려지는 이 꽃은 잎이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고, 다섯 개의 꽃받침과 꽃잎을 가지고 있다. 그 위로 실 모양을 한 덧 꽃이 피어나는데 덧 꽃부리엔 보라색의 뱀눈 같은 무늬가 있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피어나며 이는 시계 꽃과의 상록 넝쿨식물로 꽃시계 넝쿨이라고도 한다. 항상 오전 10시부터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 한다는데 꽃받침엔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놓은 듯이 물방울이 송송 맺혀있다. 밤새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느라 쏟아 낸 산고의 편린임을, 그것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화되는 시간의 고갯길에 서린 아픔이었다. 어떤 일이든지 변화되는 과정 속엔 나름의 고통이 따르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애처로워 목울대로 찐득한 아픔이 번져왔다.

덧 꽃 위로 다섯 개의 노란 꽃술이 있고, 그 속에 연록색의 꽃술 세 개가 마치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실모양의 덧 꽃은 동그랗게 둘러 쳐진 것이 시계의 숫자 판을 꼭 닮았다. 꽃이 다 피는 데는 약 1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이 곳을 다녀갔던 대통령들은 이 시계 꽃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였을까? 대통령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시계 꽃의 의미는 어떠한 걸까? 그들은 한마디의 말로 산천초목을 흔들었을지 몰라도 시간의 정서 속에선 권력도, 부富도 아무런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으리라.

너, 나, 아니 우리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한, 시간은 생각, 이념, 문화, 문명, 모든 것을 눈부시게 변화 시킨다. 그러나 작은 시계 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 어떤 변화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정작 시간의 존재조차 모른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구분 지어 놓고 이거다 저거다 따지는 것이지, 꽃은 주위의 그 어떤 왜곡이나 편견, 또는 속박마저 뛰어 넘은 자연의 섭리 속에서 믿음으로 피어 난 자연의 아름다운미소일 뿐. 그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오고 갈 때를 알아 미래를 위한 제 분신하나, 세월 속에 흔적처럼 남겨두고 시나브로 사그라져 간다. 그렇게 자연의 믿음으로 피어나 제 타고난 본성으로 말없이 사랑으로 살다가 어느 날 바람처럼 훌쩍 떠나버리면 이 세상에서 제 본분을 다한 것이다. 오래도록 부귀영화 보자고 누구를 짓밟는 일도, 꼭 유월에 피어나야만 한다고 맹서 하지 않아도 자연의 약속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 들의 믿음은 영원하다. 그래서 시계 꽃의 꽃말이 믿음이었을까!

이 너른 저택 한 구석에서 때가 되면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시계 꽃의 믿음, 누군가 확인 하지 않아도, 누가 있어 피어나고, 누가 없어 피어나지 않으려 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아 목소리 키워가며 따지지 않고 단지 자연의 그 믿음만을 지니고 살다가 소리 없이 떠난다.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해마다 찾아오는 시계 꽃을 바라보며 나 자신 또한 누군가의 가슴에 한 송이 믿음의 꽃이었음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망초 꽃이 나를 보며 하얗게 웃었다. 하얀 미소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 잠시 머물다 갈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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