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청주목 관아 부속 누정 <임병무>
추녀 끝에 고려의 잔영을 붙들어 매고 있는 망선루엔 청주시민 보다도 더 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이 스쳤다. 용마루 끝의 봉황은 금방이라도 서까래를 박차고 푸른 하늘로 솟구칠 기미다. 7백년 세월의 무게가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마는 고려시대 아름드리 소나무로 만든 배흘림 기둥은 끄떡없이 팔작 지붕과 우물마루를 머리에 이고 있다.
우리 고장에서 이처럼 오래된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은 망선루가 유일하다. 물론 조선시대 여러 번 개축한 흔적이 있으나 그 근원은 고려에 있으므로 구태여 상한선을 내려 잡을 이유가 없다.
저 광폭한 일제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유린하면서 수많은 문화재를 살육하였는데 청주읍성, 남석교 등과 더불어 망선루도 그 직격탄을 맞았으니 선녀와 은하수를 바라보던 청주목의 낭만은 게다 짝에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그 부서진 역사의 조각을 모아 제일교회로 갔다가 고향집을 찾지 못하고 80년만에 쓰리 쿠션을 먹어 고향 초입인 중앙공원에 번듯하게 이건(移建)되었으니 망향의 설움과 눈물을 다 합치면 무심천 물이 솔찮게 불어날 것이다.
"서원(西原) 천 년 옛 고을은, 민족의 정기 담은 백두대간 동으로 흘러내리고 비단결 금강(錦江) 하늬바람 따라 달리며 굽이치는 한수(漢水) 북향 길을 잡는 서기(瑞氣) 어린 곳이다. 먼 옛날 두루봉 선인들의 자취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무상할사 남으로 나는 까치 소리 문득 그립고 옛 선인들의 모습, 아련한 흔적 꿈처럼 희미하다. 솥발 형세로 서로를 겨루던 삼국 시절 청주는 나라의 중심이었으니 청주인들의 불편부당하고 온유한 심성은 그로부터라고 전해온다. 고려의 옛 이름은 청주라 했는데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하늘아래 맑은 고을 이 곳에, 달나라 계수나무 은도끼로 찍어 내고 구름 속 목란(木蘭) 금도끼로 끊어 내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로 지은 누각 하나가 날아갈 듯 우뚝 섰다...중략 2000년 7월 글 충북대학교 교수 김승환"
터의 매입에다 복원비 등을 포함하면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여기에는 사유재산권과 맞물려 청주시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성격도 못되었다. 뒷 얘기이지만 청주시의 의지가 작용했고 예산을 미리 확보했더라면 충분히 제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최선책은 물 건너 갔고 차선책으로 이전 부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원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공원이 적당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청주시는 지난 2000년 12월에 중앙공원 북쪽 척화비가 있는 부근에 망선루를 이전 복원한 것이다.
망선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제일교회 안에 있을 적에 야학의 불을 밝히며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청주 YWCA가 태동하는 등 근대 여성운동의 불 심지를 돋운 곳이라는 점이다.
1924년 9월, 이곳에서는 청남학교가 문을 열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일제가 조선어 독본을 폐지한 가운데에도 헌책을 구입하여 우리말과 글을 읽혔다. 청신학교도 이곳에서 문을 열어 주경야독의 터전이 되었었다.
망선루는 고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충청도 지방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이 별반 없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팔작 지붕에다 겹처마를 했고 기둥은 전통양식인 배 흘림 기둥이다. 배 흘림 기둥이란 기둥 가운데 부분이 임산부처럼 불룩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위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형태를 말한다. 이로 인해 건물의 안정감, 균형미가 일품이며 선비의 고고함까지 살아난다.
건물이 크기 때문에 용마루를 받치는 대들보가 4개이고 대들보 위에는 이를 보좌하는 '종보'도 4개 있다. 종보는 대들보 보다 길이가 짧다. 전통적인 수키와 집으로 수키와 골 내림마루가 자연스럽게 하강을 하고 있으며, 추녀가 날렵하다. 주위로는 난간을 둘러 고풍스런 맛을 더했다.
복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해체를 막상하고 보니 부식이 심해 쓸만한 목재가 많지 않더라는 것. 최대한 옛 목재를 살려보려고 했으나 안정성이 없어 결국 3분의 2 정도가 새 목재로 충당되었다.
약간 비좁은 맛도 있으나 망선루가 중앙공원에 들어섬으로 해서 공원의 운치가 한껏 살아난다. 청주예총(회장 김동연)은 망선루 이건을 기념하여 2001년 서예대회를 연데 이어서 망선루를 주제로 한 한시(漢詩)와 시조를 통한 누정시(樓亭詩)를 엮어 책으로 발행할 예정이다.
청주예총은 지난 봄, 전국의 시조시인, 유림을 대상으로 망선루 관련 작품을 모집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할 계획이다. 또한 그중에서 글제(書題)를 선택, 추후에 열릴 망선루 서예대회의 글제로 삼는 다는 것이다.
망선루에 대한 한시는 여러 편이 전한다. 박노중(朴魯重) 김종직(金宗直) 양희지(楊熙止) 등 기라성 같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흔적을 남겼다.
" 마을에 부슬비 내리고/ 절에서는 저녁 종소리 울리기 시작하도다/ 이끼 낀 벽에 달팽이 지나간 자국 글자를 이루었고/ 모래층 뜰의 새 발자국은 호서로다/ 못은 깊어 바닥까지 깨끗하고/ 누각은 높아서 훤하게 트이었도다/ 임금 수레 가신 뒤 소식 없고/ 귀뚜라미 울음소리 나에게 하소연 하는 듯 하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증보 해동시선' 에 실린 양희지의 시다.
그 옛날 공민왕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의 방을 써 붙이던 곳에서 오늘날 서예대회나 백일장이 다시금 열리고 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모양이다. <임병무>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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