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대규모 동원은 물론 독재국가에 잘 어울린다. 히틀러와 무쏠리니의 철권통치가 그랬고, 지금도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가 즐겨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동원(動員)이다. 우리가 봐도 경이롭기만 한 북한의 집단체조는 민주국가에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북한에선 과학으로까지 치부된다.
과거 우리나라 군사정권은 소위 관제시위를 통치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민심이 수상하다 싶으면 특정 사건을 부풀려 운동장 혹은 체육관으로 대규모 인원을 동원시켜 열나게 구호를 외치게 했다. 개인이 집단에 함몰되면 이상한 마력을 느낀다. 관광버스를 탄 단체여행객이나 훈련중인 예비군 아저씨들이 노상방뇨 등 평소 않던 짓을 거리낌없이 해대는 이유도 바로 집단귀의(集團歸依)가 주는 기(氣) 때문이다. 억눌렸던 민중들에게 있어 집단화를 통한 동일한 행동양식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 동인이 된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칭호(稱號)나 강령(綱領) 문장(紋章) 복식(服飾) 등 외형적 상징물로 표현되고 사람들은 이 때문에 환호하며 동질감을 확인한다.
지금 온 나라가 붉은 악마와 길거리 응원으로 술렁이고 있다. 한국 경기가 있을 때마다 붉은 티셔츠는 없어서 못팔 지경이고 어른 아이 할 것없이 길거리 순례단에 몸을 맡기길 주저하지 않는다. 응원이 열리는 장소를 향해 끝없이 몰려드는 인파를 보노라면 마치 1초 앞의 운명도 감지못하는 부나방의 돌진을 연상시킨다. 무엇이 이토록 한국민을 맹목적으로 이끌고 있는가. 외국의 언론들은 한국의 엄청난 ‘집단화’를 이해하느라 야단이고 국내 학계와 언론에선 이런 사회현상의 원인을 진단하느라 법석이다. 분명 우리 스스로도 예상못한 황홀한 경험이다. 걱정되는 것은 우리 민족성에 대한 평가에 이런 현상이 일부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 혹은 그 국민성에 대한 성격 규정은 통상 한 두가지 피상적 사실로써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논리와 이론을 좋아하는 독일인, 여유와 직관의 프랑스인, 전통과 신분의식이 강한 영국인, 축소 지향적이며 집단의식이 강한 일본인 등, 대개 이런 식이다. 그런데 국민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엉뚱하게도 적대적인 감정에서 시작됐다. 미국이 2차 대전을 전후로 독일 소련 일본 등에 대해 주로 적국연구(敵國硏究)라는 입장에서 시작한 게 국민성 연구의 단초다. 안타깝게도 월드컵에서 우리한테 패한 나라들이 이런 적국적 시각에서 붉은악마와 길거리 응원단을 매도한다고 한다. 이태리가 패하자 그곳 방송에선 ‘오~지겨운 한국인’이 터져 나왔다. 행여 냄비근성이니 들쥐근성이니 히스테리적 발작이니하는 못된 단어가 이들 나라의 언론에 실리지나 않는지 심히 우려된다.
필자는 축구에 대한 지금의 국민적 광기(!)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다. 축구는 스케일이 큰 반면 승부가 단순하다는 데에 매력이 있다. 상대의 문에 골을 성공시키면 그만이다. 사실 많은 스포츠중에서 축구만큼 규칙과 승부가 명쾌한 것도 없다. 지금 길거리응원단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 축구를 정확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축구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던 층이었다. 단순하면서도 확실하게 승부를 가리는 축구, 뛰고 넘어지면서 인간 최고의 본능적인 욕구를 발산시키는 매력이 집단의식의 마력과 접목되어 이들을 거리로 유혹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의 현상을 스포츠 외의 다른 잣대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월드컵이 끝나면 그 상실감으로 자살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잘난 사회학자들의 예단이 제발 빗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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