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2> - 제천시<3>

▲ 정방사 전경. 정방사(淨芳寺)는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52번지 금수산(錦繡山)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금수산(1,016m)자락 신선봉(845m)에서 청풍 쪽 도화리로 줄기를 뻗어내린 능선상에 자리잡고 있다.『청풍읍지』에 따르면 ‘정방사는 도화동에서 오리 허에 있으며, 전하여 오기를 신승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 하더라. 동쪽에 큰 반석이 있는데 동대, 또는 의상대라 부른다’라고 써 있다. 또 다른 기록인 『제천군지』에 ‘정방사에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2년(662) 임술에 의상조사가 견성 성불하기 위하여 절을 세우더니 당나라에 유학한 바 있다’ 라고 쓰여 있다. ▲ 정방사에 보는 충주호 풍광 .멀리 월악산이 보인다
금수산 정방사 법당 마루에 걸려있는 「정방사 창건연대기」는 1954년에 혜봉스님이 지은 것인데 이에 의하면 662년(신라, 문무왕 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969년에 발간된 『제천군지』에도 662년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의상이 중국에 건너가 화엄학을 공부하던 시기이므로 662년에 정방사를 창건했다는 창건설에는 의문이 있다. 하지만 의상이 창건한 절집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물이 귀한 깊은 산에 절을 지었다거나, 또는 관음신앙과의 밀접한 관련 등이 정방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아 연대의 차이는 있지만 의상스님이 창건했다는 자체는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 석조관음보살입상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년)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우리 나라 화엄종의 시조이다. 19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왕 4년)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요동까지 갔으나 첩자로 오인 받아 되돌아 왔다. 그 후 10년이 지난 660년에 다시 당나라로 가던 중 원효는 중도에서 돌아오고 의상만 들어갔다. 당나라에 간 의상은 중국 화엄종 제2조인 지엄 문하에서 현수와 함께 화엄을 공부했다. 그때 지은 「화엄일승법계도」를 본 지엄은 자신의 ‘73인(印)’ 보다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우리 나라 불교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법성계」가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의 내용이다. 그 뒤 현수는 중국 화엄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10년 만인 670년(문무왕 10년)에 귀국하였다. 그 해 낙산사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렸는데 이 때 쓴 261자의 간결한 「백화도량발원문」에서 의상의 관음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676년 왕의 뜻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華嚴)을 강론하고, 화엄대교를 선양하기 위하여 화엄사, 해인사를 비롯하여 화엄 십찰을 건립하기도 하였다.의상대사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3,000명이 넘는 제자들 양성이었다. 정방사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설화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의 문하에는 여러 제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정원이라는 제자가 십여 년이나 천하를 두루 다니며 공부를 하여 세상사가 모두 무상함을 깨닫고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펴고자 스승을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스승이 원주에 있는 어느 토굴에서 수행하고 계심을 알고 대사를 뵈러가니 스승은 큰 반석 위에 앉아 정진을 하고 계셨다.정원은 스승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여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하옵니다. ” 스승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원이 다시 여쭈었다. “십여 년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여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간을 떠나지 않았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원이 이렇게 말씀 드리고 다시 삼배 합장하니, 그제서야 스승인 의상대사께서 “너의 소원이라면 이 지팡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어 불법을 홍포하여라, 산 밑 마을 윤씨 댁을 찾으면 너의 뜻을 이루리라.” 하셨다. 정원이 고개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스승께서 던진 지팡이(석장)가 하늘에 둥둥 떠서 남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뒤를 따르니 지금의 정방사 자리에서 멈추어서는 것이 아닌가. 산세는 신령스러워 흡사 법왕국의 자리와도 같았다. 정원은 즉시 산 밑 마을의 윤씨 댁을 찾아 그 뜻을 전하니 주인은 “어젯밤 꿈에 의상이라는 스님이 흰구름을 타고 우리 집에 오셔서 ‘내가 그대의 전생을 잘 알고 있소. 불연이 있어 말하는 것이니 내일 어떤 스님이 오거든 절 짓는데 도와주길 바라오’ 하더니 구름을 타고 가셨습니다.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창건된 사찰은 정원 스님의 ‘정(淨)’자와 아름다운 산세를 지녔다는 뜻의 ‘방(芳)’를 써서 정방사(淨芳寺)라고 하였다. ▲ 지장보살입상
현재 정방사 경내에는 법당, 칠성각, 유운당, 석조관음보살입상, 석조지장보살, 마애지장보살입상, 산신각, 종각 등이 있다. 관세음보살좌상을 주존으로 봉안한 법당은 팔작지붕에 앞면 6칸, 옆면 2칸의 규모로서 암벽에 거의 붙여서 지었다. 건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붕에 얹힌 기와의 명문을 통해 1838년에 중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존불인 관음보살의 크기는 높이 60㎝, 어깨너비 30㎝로 연대는 알 수 없다.

관음보살상은 목조로 조성되어 법당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었는데, 몇 해 전 개금불사 때 복장물이 나와 절의 역사를 밝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복장물로는 관음상 봉안시 발원문을 비롯 『대불정수능엄신주』와 범어로 된 다라니경이 있었다. 그러나 발견 당시 이 지본들이 순서 없이 구겨진 채로 있었던 데다가 다른 복장물이 없던 것으로 보아서 나머지 복장물은 이미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불정수능엄신주』는 제천시 한수면 월광사지에서 발견된 남한지역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대불정수다라니석비와 똑같은 범자로 쓰여진 목판본으로 크기는 20×40㎝이다. ‘대불정수’는 부처님의 정수리를 뜻하는 말로 아주 신통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능엄신주’는 불가에서 이를 외우거나 베껴쓰기를 많이 하면 큰 영험이 있다 하여 예로부터 많이 해오는 기도의 한 방법이다. 발원문은 1688년(조선, 숙종15년)에 작성된 것인데, 바로 이 해에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로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후불탱화는 1928년에 금어 관하종인 스님이 광목 바탕에 그린 것으로서 크기는 가로 155㎝, 세로 123㎝로 된 채색화이다. 그림 중앙에 석가여래상을 비롯한 삼존불이 있고, 뒤로는 성자의 무리들이 있다. 이 불화를 그린 금어 관하종인 스님은 1901년(대한제국, 광무 5년) 순천 선암사에서 조성한 약사여래도의 편수로 참여한 분이기도 하다.

신중탱화는 법당 마루에 걸려 있는데, 조성연도 및 금어 등은 후불탱화와 같다. 크기는 가로 102㎝, 세로 121㎝로 역시 채색화이다. 그림 중앙에 동진보살이 크게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6명의 신장이 서 있으며 성자의 무리들이 있다. 신중탱화는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인도 재래의 토속신뿐만이 아니라 전파되는 지역의 토속신들까지 불교신앙으로 포용하여 불법수호신으로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신중탱화의 이해와 파악은 곧 그 지역 토속신앙의 이해이며 한국 신중탱화의 이해는 곧 한국 토속신앙과의 교섭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외부 처마 밑에는 ‘정방사’ 편액이 있는데 석종 안종원(1874∼1951)의 글씨다. 또한 4폭의 주련은 법당이 중수된 1825년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작자는 알 수 없다.

▲ 법당 뒷편의 바위. 거문고처럼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다. '석금실'이란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주련은 기둥이나 바람벽 같은 곳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를 말하는데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高無高天還返底(고무고천환반저)淡無淡水深還墨(담무담수심환묵)僧居佛地少無慾(승거불지소무욕)客人仙源老不悲(객인선원노불비)높음이 하늘보다 높은 것 없으나 도리어 밑으로 돌아가고맑음이 물보다 맑은 것 없으나 깊음이 도리어 검다.스님은 불국정토에 있으니 별 욕심이 없고사람이 선원에 들어가니 늙음이 또한 슬프지 않더라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칠성각 건물은 법당과 같은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된다. 안에는 칠성탱화, 나한탱화, 독성탱화 그리고 높이 44㎝, 너비 25㎝의 위패 1점이 있다. 칠성탱화와 나한탱화는 모두 1900년(대한제국, 광무4년)에 조성되었는데 영운 봉수 금어스님이 그린 것이다. 크기는 칠성탱화가 가로 143.5㎝, 세로 107㎝이며, 나한탱화는 가로 110㎝, 세로 142㎝이다. 독성탱화 역시 1900년에 조성되었으며, 금어는 혜원스님이다. 혜원스님은 1903년(대한제국, 광무7년)에 조성한 예천 용문사 산신도를 출초한 금어이기도 하다. 크기는 가로 114㎝, 세로 143.5㎝이다. ▲ 산신각. 소나무 숲에 가려져 언뜻 스쳐 버리기 십상이다.
산신각은 석조관음보살입상 왼쪽 절벽 밑에 있는데 맞배지붕에 사방 한 칸의 규모로서 1988년에 석구 스님이 새로 지었다. 소나무와 숲에 가려 언뜻 스쳐버리기가 쉽다. 안에는 1954년에 조성된 가로 141㎝, 세로124㎝ 크기의 탱화 한 점이 봉안되어 있는데, 산신이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산신 앞에는 서책과 필묵이 묘사되어 있다. 요사채 겸 객사로 사용되고 있는 유운당(留雲堂)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이다.

처마 아래에 유운당 편액이 있는데 1913년 무렵에는 석수당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기둥에 있는 주련의 내용은 선시인데, 글씨는 중국 송의 유명한 서화가 미불의 글씨를 복각한 것이다. 네 번째 주련 하단 왼쪽에는 ‘미불(米版)’이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주련의 내용과 그 의역은 다음과 같다. 山中何所有(산중하소유) 嶺上多白雲(영상다백운) 只可自治悅(지가자치열) 不堪持贈君(불감지증군)산중에 무엇이 있을까 고개 위에 머물러 있는 흰구름 같은 것 그러나 나 홀로 즐길 수 있을 뿐 님에게까지 바칠 수가 없구나 얼마나 높이 절이 매달려 있으면 구름이 머무는 곳이란 의미의 유운당이라 이름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편액 글씨는 석종 안종원의 글씨다. 그 옆에는 석금실(石琴室)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법당 뒤편의 바위가 마치 거문고 모양처럼 갈라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정방사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석조지장보살입상과 마애지장보살입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지장보살입상 뒤에 마치 후불탱화처럼 마애지장보살입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1994년 산신각 옆 암벽 사이에서 고려시대 백동경이 하나 발견되었다. 동경은 주로 고분에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과 함께 출토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고분이 아닌 사찰에서 그것도 바위틈에서 다른 유물 없이 동경 하나만 발견된 것이 흥미롭다. 크기는 지름 11.3㎝로 자그마한데, 소국(작은 국화) 무늬가 빽빽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틈새로 새 두 마리가 마주보며 날고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고려시대 동경 가운데 거의 비슷한 것이 있어 이 동경 역시 고려시대 작품으로 생각된다.또 정방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름 53㎝, 높이 14㎝의 맷돌이 있다. 그리고 최근 조성된 범종이 있다. 정방사는 그 위치가 깊은 산속 암벽 밑에 위치한 관계로 물이 매우 귀한 곳이다. 큰 암벽에 가까이 붙여서 절을 지었으므로 경내가 협소하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금성면 안암에서 청풍강 구곡벼랑을 끼고 돌아서 도화리 뱃머리를 지나 두, 세 시간 가량 걸려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이렇듯 절이 자리한 위치가 아주 협소하고 험한 만큼 영험있는 관음기도 도량으로 이름나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특히 법당 뒷편 바위틈으로 흘러 나오는 석간수는 그 물맛으로는 전국 제일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물이 나올까 신기하기 그지없다. 뭐니뭐니해도 정방사가 가지고 있는 큰 매력은 더할 나위 없는 빼어난 경치다. ▲ 이방운 작 「도화동천」. 도화동천은 도화리 일대의 산수가 빼어나 일컬어진 이름이다.
멀리 백두대간과 월악산 영봉까지 백여리가 넘게 확 트인 시야, 미인의 눈썹처럼 아스라하게 겹쳐진 능선들, 발 아래로 휘어져 흘러가는 남한강이 비단처럼 펼쳐진 정방사 노송 밑에서 바라다 보는 석양, 어스름이 깔리며 석양에 금빛으로 피어나는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가 바로 불국정토다.

정방사 가는 길은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36번 도로를 따라가다 수산 삼거리에서 청풍, 제천 방향으로 좌회전 하여 597번 도로를 탄다. 청풍과 문화재단지를 지나 청풍교를 지나 상천 방향으로 655번 도로를 탄다. 도화동 도화교를 지나고 능강콘도미니엄을 지나 능강교를 지나면 왼쪽으로 얼음골과 정방사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도로 입구에서 산길로 2㎞ 가량 차로 겨우겨우 절 아래까지 닿을 수 있다. 특히 4월초순에서 8월초까지 얼음이 얼었다가 처서를 전후해 얼음이 녹는다는 얼음골은 금수산 7부능선에 있는데 천여평방미터의 돌밭, 돌무더기에서 20~40㎝ 가량 들추면 밤톨만한 얼음덩어리가 쏟아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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