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목(淸州牧)의 역사 이정표 <임병무>

 청원군청 뒤편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청주목 동헌, 청녕각(淸寧閣)은 청주 역사의 표석(標石)이자 우체국이다. 청주목 동헌을 왜 우체국에 비유했는가 하면 어느 도시건 우체국이 바로 그 도시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청주에서 몇 km 하는 식은 청주 우체국을 그 기점(基點)으로 하는 것이다. 청주 역사의 우체국 격인 청주목 동헌은 그래서 '이전 불가' 판정을 번번이 받는다. 역사의 보물이 오늘날 왜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일까. 그것은 청원군 청사가 좁은데다 문화재보호구역이어서 건축행위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청주목 동헌 이전문제는 툭하면 불거지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청원군청 앞으로 옮기려다 도 문화재위원회로부터 제동이 걸려 무산됐다. 청주목 동헌은 이런저런 푸대접 속에서도 행여나 쫓겨 날까 군소리 한마디 못하고 있다.

▲ 구한말때 선교사가 찍은 동헌 모습. 외삼문과 「청녕각」현판이 보인다. 신 청사에 가려 햇빛도 안 들고 통풍도 안 된다. 서까래는 썩어 들어가고 기와도 망가지고, 시골학교 분교를 연상할 만큼 격자(格子)모양의 유리창을 만들어 참으로 괴상망측한 꼴이다. 그래도 청사로 사용될 때까지는 먼지는 털었으나 창고 신세로 전락한 후부터는 숫제 애물단지다.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이도 별반 없다.우리는 파리의 개선문이나 로마의 콜로세움을 옮긴다는 소리를 듣도 보도 못했다. 만일 동헌을 타처로 옮긴다면 기준점이 흔들림으로 해서 여타 문화재도 체감적인 자리바꿈이 불가피하다.일제의 만행으로 청주읍성이 없어졌고 그 외에도 수많은 객사가 없어졌거나 타처로 옮겨진 아픈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지난 1988년까지 중앙공원에 있는 2층 누각에는 청녕각 현판이 걸려 있었고, 따라서 모든 시민들이 이를 청녕각으로 알고 있었다. 도지(道誌), 시지(市誌), 삼대사지(三大史誌) 등 관련 문헌에도 모두 이 건물을 청녕각으로 기록했고 현장의 문화재 안내판도 청녕각으로 표기, 설명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청원군청내의 청주목 동헌이 바로 '청녕각'이라는 주장이 청주대 한문과 이상주강사에 의해 제기 되었다. 그 증거는 우선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서문당 간)에 실린 청녕각 사진이 중앙공원 청녕각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이 사진은 일제초기인 1920년도에 외국인이 촬영한 것인데 청녕각 현판 글씨체는 현재와 동일하나 그 현판을 달은 건물은 2층이 아닌 1층 건물이고 외삼문(外三門)과 담장이 있으며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행인 수명이 삼문을 출입하고 있다.청녕각 현판을 달고 있던 중앙공원내 2층 건물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충청병영도(忠淸兵營圖)와 정조 13년(1789)에 발행된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에 보면 목조 2층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건물인 중앙공원내의 2층 누각은 충청병영의 출입문인 원문(轅門)으로 밝혀졌다. 홍성 등 여타지방에 남아 있는 병영의 출입문과 비교하면 그 형태가 비슷하다. ▲ 1920년대의 동헌모습
서지학적 측면에서 볼 때 청주목동헌=근민헌(近民軒)=청녕각은 같은 건물을 일컫는 말이다. 여지도서에는 청주목의 많은 관사 가운데 근민헌을 목사(牧使)의 정당(政堂:집무처)이라고 기록하였다. 고종 8년(1871)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현감 이병정(李秉鼎)이 근민헌을 창건한 사실과 함께 1868년 목사 이덕수(李德秀)가 개축하였음을 전해주며 '근민헌신편청녕각중건상량문(近民軒新扁淸寧閣重建上樑文)'의 원문까지 싣고 있다.

또한 이 건물의 처마 끝에 장식된 와당에 '도광오년을유오월 일 청주아 전개건와조작(道光五年乙酉五月 日 淸州衙 全改建瓦造作)'이라는 명문이 있어 순조 25년(1825)에도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청원군청 안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영조 7년(1731)에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근민헌이며 순조 25년과 고종 5년, 두차례에 걸쳐 개축하였고 특히 고종 5년 때 개축하면서 동헌 이름을 '근민헌'에서 '청녕각'으로 바꾼 것이다.

근민헌의 '근민'은 "백성과 가까이 하여 백성이 권위에 눌리지 않고 마음놓고 관에 드나들 수 있도록 위민 행정을 펼치겠다" 는 뜻이며 청녕각의 '청녕'은 노자(老子)에 나오는 구절로 "세상이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모양"을 의미한다.

동헌 명칭에 '근민'과  '청녕' 을 사용한 것은 모름지기 위민 행정의 의지이다. 참고적으로 예를 들면 충주목 동헌의 명칭이 '청녕헌(淸寧軒)'이다.

1923년에 간행된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의 '청주연혁지'에는 관찰부를 충주에서 청주로 옮기자는 논문에서 ' 28칸의 관아 및 부속건물이 있어 관찰부를 청주로 옮긴다하더라도 청사부족 현상이 초래되지 않는다'고 기술했다. 여기에서 28칸은 현재의 동헌건물 28칸(정면 7칸, 측면 4칸)과 동일한 것으로 청원군청내의 조선시대 관아가 동헌, 즉 청녕각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상의 사실로 보아 동헌으로 구전돼 오던 청원군청내의 관아건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동헌이며 동헌 명칭이 청녕각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때 당시 '청녕각=청주목 동헌=청원군청내 관아건물'  주장은 지역 문화계에 상당한 충격이었다.

1988년 11월, 충북도문화재위원회에서는 재조사를 벌인 끝에 중앙공원내의 2층 목조 건물을 충청병마절도사 영문(營門)으로 바로 잡고 청원군청내의 관아 건물을 동헌인 청녕각으로 밝혀내면서 청녕각 현판을 제자리로 옮겨 달았다. 실로 일제에 의해 왜곡된 향토사가 60년만에 바로 잡힌 것이다.

일제 때 폐기 된 지적도 대조결과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재차 입증되었다. 당시 지적도에는 중앙공원이 청주군청 주변 본정(本町) 93번지로 지목은 대지였고 그후에도 청주시 남문로 93번지로 바뀌었다. 다만 지목이 일제 때 '대지'에서 '공원부지' 로 변경된 것이다.

   
▲ ‘동헌’또는 ‘근민헌’으로 불리는 청녕각 전경(上)과 청녕각 현판(下)
청원군청 터는 본정 3정목 176번지(대지)이고 이것이 북문로 171~3으로 바뀌었는데 토지의 경계선이 청주읍성도와 흡사할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구 청주경찰서 터(북문로 179)가 당시 객사가 있었던 담장 그림과 같아서 조선시대 관아 터가 그대로 표출되었다. 따라서 당시 객사와 강선루(降仙樓)가 있던 자리가 구 청주경찰서 부지이고 동헌이 있던 대지가 지금의 청원군청 부지에 해당한다. 동헌 동쪽으로 내아(內衙)가 있었던 대지는 담장경계 모습과 지적도의 토지 경계가 일치하고 있어 청원군청내의 관아 건물은 명백하게 동헌으로 밝혀졌다.

청주목의 기준점인 청녕각은 영욕의 근대사에서 수많은 수난을 겪어왔다. 그 수난의 첫째 원인은 일제에 있다. 1907년, 일제는 구 한국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우리의 문화재에 슬슬 손을 댔다. 그것은 물론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기인한 것이다.

1911년,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미명아래 천년고도의 표상인 청주읍성을 헐어 하수구를 쌓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충청병영과 청주목 관아의 건물도 잇따라 헐리거나 딴 곳으로 이전되었다. 객사는 헐리었고 청녕각 현판은 동헌에서 떼어 엉뚱하게도 충청병영의 출입문에다 달았는데 그것도 정면에 달지 않고 운동선수의 백넘버처럼 건물의 뒤편에 달은 것이다. 이는 한민족 문화 말살과 문화 정체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일제의 의도적 행위다. 

" 마치 한민족은 자치 능력도 없이 누각에서 놀기나 좋아한다" 라는 식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청녕각 현판을 가지고 장난을 친 듯 싶다. 우리는 그러한 피침 역사의 장난도 모르고 60년 이상이나 역사적 사실을 잘못 알아왔으니 약소민족과 스스로 우매했던 우리의 자화상에 통탄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안타까운 일은 광복이 되었음에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우리 스스로가 애물단지로 여기거나 평가 절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다 허물어져 가는 옛날 건물이 뭐 길래 건물도 못 짓게 하고 난리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거나 말은 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방화와 세계화는 도로아미타불이요, 집안으로 치면 족보가 낡았다고 해서 내다 버리자는 식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6.25 동란 당시에도 족보를 안고 피난길에 나섰다. 죽는 한이 있어도 뼈대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주, 청원의 뼈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역사의 표석인 청주목 동헌, 청녕각이다.

청주목 동헌의 보존은 물론, 이를 중심으로 한 청주목 관아 복원이라는 과제에 접근해야 청주, 청원의 역사 정체성이 살아난다고 본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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