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경복궁 탈출노린‘춘생문 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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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경복궁 탈출노린‘춘생문 사건’의 진실
  • 정홍철 기자
  • 승인 2005.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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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충민공 이도철, 명성황후 시해에 맞서 저항
고종 복권시켜 시호내려,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명성황후시해(을미왜란)→춘생문의거→단발령→을미의병→아관파천→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한말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점철된 역사이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주권침탈야욕이 기승을 더하는 가운데 국모(國母) 명성황후가 일본낭인에 의해 시해(을미왜란)됐다.

궁궐은 일본군의 감시가 그 강도를 더했으며 친일세력들로부터 고종은 감금 되다시피 했다. 이에 고종은 친정세력들에게 밀지를 내려 궁궐을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거사는 밀고자로 인해 경복궁으로 통하는 춘생문(春生門)을 넘지 못한채 주동자들이 생포되어 참형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춘생문 의거(춘생문사건)다.

춘생문 의거의 주도 세력 중 제천출신인 충민공(忠愍公) 이도철(李道徹ㆍ1852~1895)의 행적을 올바르게 밝히는 학술세미나가 열려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25일 제천문화원(원장 송만배)이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소장 이창식)와 공동 주관으로‘충민공 이도철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대한국사>등에는 ‘이도철 등이 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춘생문을 월장하다 실패해 참수 당했다’고 왜곡된 채 기록되어 있다. 이번 세미나는 그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충민공 이도철을 중심으로 춘생문의거를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재조명하고 평가하는 학술회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도철의 구국정신과 복수창의 춘생문의거에 대한 진실규명으로 제천이 나은 큰 인물이 재평가 되었으며 지난 1998년 8월 제천문화원 주관으로 ‘을미왜란 복수창의사 심포지움’이 개최된 이래 제천이 배출한 이도철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춘생문 의거와 충민공 이도철
춘생문의거는 명성황후가 시해(을미왜란)되고 궁궐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세력에 의해 연금당하다시피한 고종이 친미파계열 인사들에게 밀지를 내려 왕궁 밖으로 탈출, 미국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왕권을 회복하려했던 시도였다. 고종이 평양대장으로 있던 군부협판(軍部協辦) 이도철에게 해원(解寃ㆍ분풀이)하고자 ‘칙령(勅令) 솔병내호(率兵來護) 궁성주토흉역(宮城誅討凶逆) 대조선(大朝鮮) 대군주(大君主) 함(啣) 이재황(李載晃) : 나를 궁궐에서 구하라’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에 이도철은 시종(侍從) 임최수 등과 1000여명의 친위대와 함께 복수창의(復讐倡義)를 결의하고 경복궁의 춘생문을 넘어 고종을 구출, 왕권을 회복키 위해 시도했으나 이진호의 밀고로 실패하게 된다.

춘생문으로 쳐들어가려던 무력거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은 체포되어 ‘역모죄’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춘생문의거가 고종의 비밀칙령에 의해 거사됐지만 이도철 등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철저히 임금을 사건에 관련시키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갔다. 훗날 고종은 춘생문의거와 관련 순절한 신하들에게 충절을 생각하여 복권, 충민공(忠愍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장충단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충민공 이도철과 제천
이도철은 1852년 제천 즌암(현 천남동)에서 전주 이씨 경창군파로 선조대왕의 9대손으로 태어났다. 자는 성관(聖寬) 호는 두남(斗南)이며 문무를 제천향리에서 갈고 닦았다. 춘생문의거로 참수당해 1895년 두무골(현 봉양읍 삼거리)에 묻혔다.

이도철이 고종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부친 덕초(悳初ㆍ1803~1879)로 올라간다. 덕초는 고종이 어렸을 때 오랫동안 가세가 기운 대원군가의 식량 등을 조달했다. 이와 관련한 10여편의 서찰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어 이도철 집안과 고종 즉위 전후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어린 고종은 이도철을 ‘제천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도철은 제천향교가 학교체제로 운영되면서 초대교장(지금의 전교)을 지내면서 후학에도 남다른 열정으로 투철한 국가관으로 지역사회에도 왕성히 활동했다. 유림으로 황강학파와 화서학파와도 연관되어 을미의병 봉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원군가와 밀접한 관계로 훗날 과거에 급제해 고종의 신임은 더욱 굳건해 진다. 이도철은 1893년 5월. 42세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초임발령을 영월영춘 순부어사- 의금부 도사(1893. 7)-조선군 평양대장(1895.5)으로 대임을 수행하다 3개월 만에 휴직하고 제천으로 낙향한다.

거사실패로 사형… 복권과 충민공 재조명
낙향해 있던 이도철은 일본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의 밀지를 받는다. 가족들에게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죽어서 돌아오면 두무골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황급히 상경, 의금부 도사시절 친분을 맺었던 시종관 임최수(林最洙) 등과 합세한다. 1895년 8월 20일 국모시해사건 후 6일 만에 복수창의 예비모임을 하고 9월 6일 고종으로부터 밀지를 받는다. 최종모임을 통해 10월 11일 밤, 군호(암호)를 중심(中心)으로 거사가 전개됐다.

그러나 거사는 배신자 이진호(친위대 대대장)의 밀고로 서리군부대신 어윤중에게 알려져 실패한다. 거사주동자 33인은 당일 체포돼 3일 뒤에 첫 재판을 받았고 다시 9일 뒤에 주동자 이도철과 임최수 등은 사형을 구형받았다. 거사 한 달여 만에 열린 최종재판을 거쳐 새남터 사형장에서 교수형에 집행돼 재판과정 또한 긴박하게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춘생문의거 이듬해인 1896년 2월 내각총리대신 박정양과 법무대신 이번진의 이름으로 ‘작년 8월에 고 참령 이도철과, 고 시종 임최수의 창의복수사건으로 집행된 재판은 공정치 못한 재판임’등이 관보에 실리고 연이은 내각의 복권상소로 이도철과 임최수는 각각 군부협판과 내부협판에 추서되고 충민공 시호를 받는다.

또한 고종은 후손을 불러 벼슬을 내리며 묘소관리를 명하고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충단에 홍계훈, 이도철, 임최수 등과 전몰한 사졸을 배향하고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로써 당시에 이미 재조명을 통해 온당한 평가를 받았다.
/정홍철 기자 quixt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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