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어 있어야 향기가 있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솔하게 살아 갈 때 그 향기가 묻어 나온다.

햇 빛살 가득 쏟아지는 들녘으로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집을 나섰다. 나물 캐는 아낙네의 손끝에서 묻어나는 봄은 정겹고, 달콤하고, 향긋하지만, 꽃 마중 나온 이들의 옷자락에 나부끼는 봄은 화사했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로 또, 어떨 땐 겨우 시간을 내었지만 비라도 내리면 만개한 꽃들의 화려한 모습을 놓치기 일쑤다. 일 년을 더 기다려 상면 할 수 있다 해도 그 또한 꼭 볼 수 있다는 기약이 없다. 무슨 일이든 삶에 있어, 내 하고자 하는 일들 이 모두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가! 매사가 그렇지 못하니 우리는 늘 바득, 바득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봄날에, 한철 꽃구경도 쉽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느긋함도 있어야한다' 고 자연이 내게 주는 무언의 가르침일지도 모르겠다.

벚꽃이 만개한 그 순간을 놓칠세라 많은 사람들이 꽃구경을 나왔다. 꽃잎들의 향연에 환호성을 치는 사람들 속을 빠져 나와 한적한 산길로 접어드니 연록의 빛깔들이 풋풋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모든 게 생소하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보아도 정겨운 오솔길, 산과 밭 그리고 논둑길, 구불구불 돌아서 흐르는 개울물,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어 그 모습 그대로가 정겹고 평화로웠다. 눈꽃처럼 날리는 꽃잎들은 어느새 내 옷자락에도 연분홍 꽃물을 곱게 들여 놓았다. 이렇게 자연은 그를 향해, 언제든 달려가면 말없이 포근하게 안겨온다.

꿈결인 듯 걷는 봄 길은 강보에 싸인 채,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가를 생각나게 했다. 나도 이 산야에 한 그루 꽃나무 되어 연분홍 빛 촉촉한 꽃망울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나를 향해 여린 햇순이 말끄러미 바라보다 배시시 웃으며 언제나 이 자리에 계속 머물 수 만 없는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여린 순은 어느새 원숙한 자신의 미래를 향한 꿈에 젖어 들고 있었다.

산굽이를 안고 돌아서니 연분홍 치맛단을 자근자근 밟듯이 하고 수줍은 미소를 띤 여인이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천박하거나 야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가끔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교태를 부리지 않는다. 은근한 미소를 품고 있어 결절한 기품이 오히려 고고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제 모습 그대로 서있을 줄 알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맑은 가슴이 되게 한다. 오래 바라볼수록 달빛처럼 그윽하게 젖어드는 사랑스러움이 있고 ,늘 만났던 사람 같은 익숙함이 있어 더욱 정겹다.

벚꽃은 한 송이로 피는 것 보다 꽃구름처럼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야 그 멋이 있고, 복사꽃은 산중에 두어 송이 피어나야 한결 고풍스런 멋이 있다. 벚꽃이 뽀얀 속살 드러내고 쏟아내는 정열을 지니고 있다면 산 복사꽃은 수줍은 여인의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여름이 오면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 보단 조금 더 큼직한 열매를 맺는다. 술을 담그면 겉보기 보단 속이 야무져 그 향과 맛과 깔이 일품이다. 웬만한 양주 맛에 비기랴! 어쩌면 속 빈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비어있는 고급 양주병에 넣어 술을 권하면, 이는 영락없는 고급양주로 변신을 한다. 술이 있어 오가는 정이 있고, 취해서 읊조리는 인생 속에 그 삶의 향이 묻어나니 복사 꽃 피면 다정한 벗 불러들여 작년 봄에 담가두었던 복숭아주로 봄날을 한껏 취해 보리라.

나의 소녀시절, 어머니께서 산 복숭아술을 담가놓고 술 익기를 기다리셨다. 술 맛 만큼이나 감칠맛 나는 사윗감을 기대하시며 제일 큰 병의 것은 맏사위 몫으로, 중간크기는 둘째 몫, 예쁜 병에 든 것은 막내 몫으로 정해놓으셨다. 그럴 때면 나는 사윗감 얘기에 짐짓 딴청을 부리곤 했었다. 그러면 어머닌 당신의 새색시 시절로 달려가셨다. 명절이면 처갓집을 찾아오는 맏사위를 위해 외할머니는 맛깔스럽게 산 복숭아술을 담가놓으셨단다. 아무려면 사위보다야 딸이 더 애잔하셨을 게다. 좋은 술과 안주는 내 딸에게 더 잘하라고, 장모가 사위에게 내리는 모종의 말없는 당부가 아닐까! 모녀지간의 그 끈끈한 정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리요!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어머니도 당신의 어머니를 가슴깊이 품고 계시기에 복사꽃 피면 어머닌 늘 술 익어 가는 가을을 생각하셨다.

먼 훗날, 이 작은 가슴에도 삶의 맛과 향이 익어가고 깔의 깊이가 더 해 갈 때쯤이면, 깊은 산 속 고목에 두어 송이 복사꽃이 필 때마다 저편으로 흘러간 세월들을 가슴에 품고 산 복숭아 술 익어 가던 날들을 그리움처럼 품고 살게다. 


산 복숭아꽃 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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