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사는 와룡산성 안에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와룡산성만큼 고산사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절이다. 고산사에 관한 기록은 1920년에 당시 주지 유호암 스님이 기록한 「고산사중수기」를 참고할 수 있다. 이 현판은 비록 작성연대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현판마저 부서져 조각으로 뒹굴다 그마저 이제는 흔적조차 없어졌다고 고산사에 머물고 있는 등심(50)보살은 말한다. 이 중수기에 따르면 고산사의 창건 연대는 879년(통일신라 헌강왕 5년) 도선화상(후에 국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뒤 고려초에 대경국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이어 1096년(숙종1년)에 혜소국사가 중건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1653년(효종4년) 송계선사가 중창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0년에 호암 스님이 퇴락한 사찰을 다시 고쳐 세웠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요사채 등 사찰의 일부가 불탔고, 여러 중요 유물들도 함께 없어졌다. 그 뒤 1956년에 월하스님이 삼성각과 요사채를 중창하면서 새롭게 도량을 가꾸었으며, 1985년 소요 스님이 주석했다.
이어 1990년에 광복 스님이 한옥으로 된 선원을 짓고 도로 확장 및 전기 불사를 했으며, 1996년에 함현 스님이 절 주변의 월형산성 일부를 보수했으며, 1997년에 삼성각을 복원했다. 응진전은 2000년에 복원 완공되어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는 장산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다. 현재 고산사에는 응진전과 삼성각, 그리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두 채의 요사채가 있는데 모두 최근에 세워진 건물들이다. 유물로는 응진전에 봉안된 석조관음보살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4호)과 석조나한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5호)이 있다. 응진전은 나한전의 또다른 말이다.
관세음보살상은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로 대자대비를 그 근본 서원으로 하며 중생들이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화신하여 구제한다고 한다. 그런데 고산사 응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높이 65㎝, 폭 40㎝이다. 관세음보살상 옆에 있는 여섯 나한상들은 높이 45∼50㎝, 폭 15㎝로서 조개를 태워 만든 흰가루인 호분을 두껍게 입혀 마치 눈사람처럼 보인다. 보살상 좌우로 각 3체씩 현재 6체만 있으나 본래는 16나한상으로 조성했을 것이다.
고산사에 오래 다닌 신도들은 이 나한상을 ‘나임’으로 부르는데 ‘나한님을 줄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으며, 정초에 나임기도를 드리는 신도가 많다고 한다. 보살상과 나한상들은 전에는 석고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정밀 조사한 결과 화강암제인 것으로 밝혀졌다. 제작시기는 대체로 조선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산사 응진각 뒤쪽으로는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삼성각은 보통 불전 뒤쪽으로 사방 한 간 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전각이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대체로 한 칸씩의 건물일 때는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을 따로 모시고 있으며, 세 칸의 건물일 때는 함께 모셔 삼성각이 된다. 독성은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있는 나반존자를 이르는 말로 미륵불이 출현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가 올 때까지 중생들의 복을 키우며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부처님 제자이다.
▲ 절 뒤편의 산성터에 뒹구는 돌로 석탑을 쌓아 놓았다.
우리 나라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 개인의 발복(發福)과 외침극복을 기원하는 나한재를 많이 함에 따라 점차 나한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한의 뛰어난 신통력이 현실적 행복을 갈구하는 말세의 대중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 독성각이 사찰 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산신각은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에서 산에 대한 숭배는 오랜 전통과 함께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하며 산신을 호법신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부여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 현생에서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장소로 산신각을 찾고 있다. 산신각(山神閣) 내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탱화만을 모시기도 한다.
칠성각(七星閣)은 우리 나라 절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전각으로 수명 장수신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봉안한 전각이다. 칠성각 내에는 삼존불, 칠여래, 도교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잘 꾸며진 정원을 한 바퀴 돈 것처럼 깨끗하고 아담한 고산사를 내려오며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응진전 둘레는 용머리에 해당하고, 응진전은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인 셈이지요. 그래서 이 터가 무지하게 센 곳이지요. 한번 내려가시다 보시지요. 맥이 하나도 끊기지 않은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용바위까지 누워있다니까요.” 차를 마시며 절집의 형상에 대해 설명하던 등심(50)보살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등뒤에는 용바위(신현1구)부터 흠집 한곳 없는 매끈하게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월악산 영봉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