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2> - 제천시<2>

▲ 가파른 산길을 1km 쯤 올라가야 고산사를 알리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와룡산 고산사(臥龍山 高山寺)는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1653번지 와룡산 반장재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륵사로 들어가는 들머리 수산 2구를 지나 단양방면으로 36번 도로를 계속해서 달리면 신현 2리와 왼쪽으로 신현주유소가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산사라고 쓰여진 갈색 이정표가 서있다. 고산사는 이정표가 서 있는 맞은편 가파른 산길을 1㎞쯤 올라가야 한다. 숲으로 하늘까지 온통 가린 고즈넉한 고산사 가는 길은 인적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한적한 길을 오른 후에야 와룡산 고산사라고 쓰여진 다듬지 않은 둥그스런 비석이 보였다. 빗돌 뒤로 나있는 와룡산성 문을 들어가 다시 돌담처럼 보이는 문을 통과하자 멀리 축대 위로 농가처럼 보이는 두 채의 슬레트 집이 보인다. 옛 고산사이다. ▲ 고산사 요사채

고산사는 와룡산성 안에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와룡산성만큼 고산사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절이다. 고산사에 관한 기록은 1920년에 당시 주지 유호암 스님이 기록한 「고산사중수기」를 참고할 수 있다. 이 현판은 비록 작성연대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유일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현판마저 부서져 조각으로 뒹굴다 그마저 이제는 흔적조차 없어졌다고 고산사에 머물고 있는 등심(50)보살은 말한다. 이 중수기에 따르면 고산사의 창건 연대는 879년(통일신라 헌강왕 5년) 도선화상(후에 국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뒤 고려초에 대경국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이어 1096년(숙종1년)에 혜소국사가 중건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1653년(효종4년) 송계선사가 중창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0년에 호암 스님이 퇴락한 사찰을 다시 고쳐 세웠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요사채 등 사찰의 일부가 불탔고, 여러 중요 유물들도 함께 없어졌다. 그 뒤 1956년에 월하스님이 삼성각과 요사채를 중창하면서 새롭게 도량을 가꾸었으며, 1985년 소요 스님이 주석했다.

이어 1990년에 광복 스님이 한옥으로 된 선원을 짓고 도로 확장 및 전기 불사를 했으며, 1996년에 함현 스님이 절 주변의 월형산성 일부를 보수했으며, 1997년에 삼성각을 복원했다. 응진전은 2000년에 복원 완공되어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는 장산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고 있다. 현재 고산사에는 응진전과 삼성각, 그리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두 채의 요사채가 있는데 모두 최근에 세워진 건물들이다. 유물로는 응진전에 봉안된 석조관음보살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4호)과 석조나한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5호)이 있다. 응진전은 나한전의 또다른 말이다.

▲ 응진전. 응진전은 나한전의 또다른 이름이다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께는 열여섯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나한은 성자를 의미하는 ‘아라한’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아라한은 응공, 응진의 자격을 갖춘 분으로 응공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을 의미하며, 응진은 진리로 사람들을 충분히 이끌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한전을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 가섭과 아난이 봉안되어 있다. 그 좌우에 열 여섯분의 나한이 웃거나 졸고, 등을 긁기도 하는 형상으로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나한전의 불단은 대웅전과 같은 불단과 달리 좁은 폭의 불단을 ‘ㄷ’자 형으로 배치하여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한을 차례로 배치하였다.일반 법당처럼 화려한 불단이나 닷집이 없이 소박하게 만든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석가모니 부처님에 비해 깨달음의 정도가 낮은 아라한을 주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산사 응진전이 자리잡은 곳은 와룡산이라는 산 이름이 말해주듯 용 한 마리가 누워있는 형국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현재 법당으로 사용되는 응진전 자리는 천연적으로 아주 묘하게 잘생긴 용 머리에 해당되는 위치로서, 쌍봉 사이로 월악산 영봉을 안산으로 마주보고 있다.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인 고산사 응진전은 다른 절집의 응진전처럼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하고 좌우로 각각 3구의 나한상을 봉안했다. 또 관세음보살 뒤 후불탱화에는 석가삼존불을 묘사하고 있어 봉안불의 구조가 파격을 이루고 있다. 응진전에서 정면을 보면 월악산이 있다.전하는 이야기로는 신라말 때 53대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빼앗기고 그 울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와룡산에 있었는데 그 때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등 자식들은 월악산의 각 사찰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월악산은 자식산이 되고 와룡산은 부모산이 되는데 응진각에서 월악산을 보면 월악산이 와룡산을 보고 늘 절을 하는 형국이라 한다. 당시 경순왕은 말을 타고 월악산과 와룡산을 오갔는데 이를 반영하듯 지금도 와룡산에는 치마령(馳馬嶺)이란 고개 이름이 남아 전하고 있다. ▲ 응진전에 봉안된 석조 관음보살좌상
관세음보살상은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로 대자대비를 그 근본 서원으로 하며 중생들이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화신하여 구제한다고 한다. 그런데 고산사 응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으며 높이 65㎝, 폭 40㎝이다. 관세음보살상 옆에 있는 여섯 나한상들은 높이 45∼50㎝, 폭 15㎝로서 조개를 태워 만든 흰가루인 호분을 두껍게 입혀 마치 눈사람처럼 보인다. 보살상 좌우로 각 3체씩 현재 6체만 있으나 본래는 16나한상으로 조성했을 것이다.

고산사에 오래 다닌 신도들은 이 나한상을 ‘나임’으로 부르는데 ‘나한님을 줄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으며, 정초에 나임기도를 드리는 신도가 많다고 한다. 보살상과 나한상들은 전에는 석고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정밀 조사한 결과 화강암제인 것으로 밝혀졌다. 제작시기는 대체로 조선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산사 응진각 뒤쪽으로는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 석조나한상. 관세음보살 좌우로 각 3구씩 봉안했다.1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건물이다. 이 삼성각 또한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고산사에는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나한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1982년 제천시에서 발행한 『내고장전통가꾸기』에 위 그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요사채 마루에는 조그마한 동종이 있는데 1950년대에 월하스님이 서울에서 사온 것이라고 한다. ▲ 석조나한상. 관세음보살 좌우로 각 3구씩 봉안했다.2
삼성각은 보통 불전 뒤쪽으로 사방 한 간 혹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전각이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대체로 한 칸씩의 건물일 때는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을 따로 모시고 있으며, 세 칸의 건물일 때는 함께 모셔 삼성각이 된다. 독성은 천태산 위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있는 나반존자를 이르는 말로 미륵불이 출현하는 용화세계(龍華世界)가 올 때까지 중생들의 복을 키우며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부처님 제자이다.

   
▲ 절 뒤편의 산성터에 뒹구는 돌로 석탑을 쌓아 놓았다.
우리 나라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 개인의 발복(發福)과 외침극복을 기원하는 나한재를 많이 함에 따라 점차 나한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한의 뛰어난 신통력이 현실적 행복을 갈구하는 말세의 대중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 독성각이 사찰 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산신각은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 나라에서 산에 대한 숭배는 오랜 전통과 함께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하며 산신을 호법신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부여하였고, 조선 중기 이후 현생에서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장소로 산신각을 찾고 있다. 산신각(山神閣) 내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을 봉안하거나 탱화만을 모시기도 한다.

칠성각(七星閣)은 우리 나라 절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전각으로 수명 장수신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봉안한 전각이다. 칠성각 내에는 삼존불, 칠여래, 도교의 칠성신 등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잘 꾸며진 정원을 한 바퀴 돈 것처럼 깨끗하고 아담한 고산사를 내려오며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응진전 둘레는 용머리에 해당하고, 응진전은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인 셈이지요. 그래서 이 터가 무지하게 센 곳이지요. 한번 내려가시다 보시지요. 맥이 하나도 끊기지 않은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용바위까지 누워있다니까요.” 차를 마시며 절집의 형상에 대해 설명하던 등심(50)보살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등뒤에는 용바위(신현1구)부터 흠집 한곳 없는 매끈하게 잘 생긴 용 한 마리가 월악산 영봉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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