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의 수문장, 임란 최초 승전보 올린 곳 <임병무>

▲ 조선후기에 제작된 청주읍 읍성도 천년고도 청주의 수문장인 청주 읍성이 존재했더라면 청주가 얼마나 멋들어진 역사도시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겠는가. 천년의 호흡을 그대로 간직했더라면, 새마을 사업이 아닌 헌마을 사업을 고집스럽게 벌였더라면, 별도의 민속촌을 건립할 필요도 없고 연극 영화 세트를 만든다고 부산을 떨 필요도 없고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의 방문도 가능했었으리라 본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햅번이 열연한 '로마의 휴일'이 아니라 김 생원과 선화 공주의 로맨스가 아롱진 '청주의 휴일'이 청주 읍성 돌 틈에서 스멀 스멀 피어오르며 뭇 사람을 청주로 끌어들였을 것이리라.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현실이 아니라 '가정법 과거'에 그치고 있다.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고 이와 더불어 왕도(王都), 서라벌과 같은 도시체제를 갖추었던 청주가 청주읍성의 소멸로 그러한 역사적 발자취를 얼른 찾아보기 힘들다는데 안타까움이 도사리고 있다.서원경성의 치소(治所:행정의 중심부)로도 강력히 추정되는 청주 읍성은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망가지고 말았다. 정확히 말해서 일제는 1911~1914년 사이에 '시가지 개정' 이라는 미명아래 우리 선조들이 이 고장을 방어하고 둥지를 틀며 살아오던 청주 읍성을 헐어 하수구 개축에 사용하였다.청주 읍성의 해체는 도시 근대화라는 그럴싸한 미명아래 저질러진 만행인데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 승병에게 패퇴한 앙갚음의 심리가 다분히 작용한 듯 하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은 청주 성을 차지하고 주둔했으나 의병장 조헌 선생, 박춘무 선생, 승병장 영규대사 등에 의해 패퇴, 청주 성을 다시 내어주었는데 우리측으로 보면 청주 성 탈환은 임란 최초의 승전이다.학자에 따라 약간씩 견해를 달리하고 있으나 대체로 청주 읍성의 역사는 서원경 당시로 소급해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신문왕 5년 춘삼월에 서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4년 뒤인 신문왕 9년(689)에는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원경성이 청주 읍성을 의미하는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여러 명에 이른다. ▲ 청주약구 근처에 있던 청남문

청주 읍성은 둘레가 1640m요, 높이가 4m에 달했다. 청주 읍성의 정확한 모습이 알려진 것은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조선 정조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읍성도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읍성의 구조를 보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인데 남문에서 북문으로 큰 길이 직선으로 뚫려있고 동문과 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나경준, 신라 서원경 치소 연구>

청주의 젖줄 무심천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가는데 현재의 무심천 위치보다 훨씬 안쪽으로 흘렀다. 청주 읍성은 경주 왕성을 본떠 축성되었으므로 도로망 등이 방격(方格)으로 짜여져 있는 등 계획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청주 읍성은 크게 두 구간으로 구획된다. 즉 중앙공원 일대는 충청병영이 있던 자리이며 청원군청, 구 청주경찰서는 청주목이 있던 자리인데 그 경계선은 청주우체국을 중심으로 현 족발골목으로 통하는 길 안쪽이다.

청주목은 청주목사가 집무하던 곳이며 충청병영은 충청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곳이다. 문(文)과 무(武)가 머리를 잇대며 청주목을 통치하고 방어했던 것이다. 충청병영은 충남 해미(海美)에 있다 효종 때 청주로 옮겼다.

이처럼 청주의 역사를 몸으로 말해주는 청주 읍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청주읍성도에서 보듯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더라면, 아니 반에 반만이라도 그 역사의 잔영을 붙들고 있었더라면 로마처럼 관광수입으로 시 재정을 꾸려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청주는 '천년 고도'라는 도시의 성격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성벽은 인도로 변했고 성안에 있던 맞배집, 팔작집, 초가는 왜식가옥과 서구식 빌딩으로 자리 바꿈하였다.

임란당시 청주 성 전투가 있던 자리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돌아가고 가라오케가 판을 친다. 무슨 치킨, 패스트 푸드점이 즐비하고 쇼 윈도우에선 노랑머리 마네킹이 실실 웃고 있다. 이게 어디 천년고도 청주인가. 오늘날 청주는 역사의 정체성을 잃고, 심하게 말해서 국적불명의 도시가 되었다.

이 고장 역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선 남석교와 더불어 청주 읍성 복원이 가장 큰 명제이고, 그 명제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당국과 시민의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에서는 배비장전의 무대가 되었던 제주목 관아 복원에 전 도민이 힘을 모으고 있다.

청주 읍성을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사유지 매입 등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부분적 복원 내지는 4대문 복원 정도가 현실에 부합된다. 시민의 협조를 얻어 성벽 효과를 연출하도록 개인 가옥 담장에 벽면처리를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읍성 복원의 꿈을 안고 청주 읍성 성벽을 따라 도는 미니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청주 읍성이 송두리채 망가지는 역사의 아픔 속에서도 불행 중 다행으로 청주 읍성의 옛 터가 그대로 남아 읍성 복원에 한 가닥 희망을 던저 주고 있다.

▲ 청주문화사랑모임에서 청주읍성 4대문자리에 세운 표지석 청주 읍성은 현재 4대문의 표석이 그 실존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1994년, 박상일씨(청주대박물관 학예관)가 비문을 짓고 문화사랑 모임에서 이를 추진하여 자연석에 그 유래를 새겼다. 4대문이 있던 자리에 위치한 표석 앞면에는 청남문(淸南門:남문), 벽인문(闢寅門:동문), 청추문(淸秋門:서문), 현무문(玄武門:북문)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4대문의 유래를 개괄적으로 적었다. (세간에서 쉽게 4대문을 일컬어 남문, 서문 하는 식은 일본식의 방위 개념이어서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고 본래의 이름을 부르는게 바람직하다)4대문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지냈던 그전에 비하면 엄청난 의식의 변화다. 여기에다 읍성 자리가 모두 인도로 변해 어렵지 않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청주백화점 입구의 벽인문에서 인도를 따라 북진하다보면 상당공원 맞은편, 지하도 입구에서 성벽은 살짝 왼쪽으로 꼬부라진다. 이는 성벽 모퉁이가 각이 진 것이 아니라 몰딩을 하듯 둥글게 처리됐기 때문이다.구 히아신스 예식장 앞에는 전기공사를 하다 나온 수 톤의 성 돌이 놓여 있다. 기단석도 보이며 확(구멍이 나 있는 돌)도 있다. 구장글제과 쪽으로 건너는 현무문 터를 자세히 살펴보면 문 터가 약간 어긋나 있다. 이는 옹성(甕城)의 약식화 된 형태인 적대(積臺)가 있던 흔적이다. 문 앞에 약간 튀어나온 성벽을 쌓아 문으로 침입하는 적을 대각선에서 공격하기 위한 설계다.대한투자신탁 앞에서도 완만히 왼쪽으로 꺾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성밖의 건물이 곡선으로 돌아가는 성벽을 따라 현재도 삼각지를 형성하며 들어서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은 성벽의 네 귀퉁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60면대 청주 성안길 모습
서쪽 성벽은 서문동 5거리, 속칭 족발골목 입구에 있는 청추문을 지나 청주YMCA에서 남사로를 건너 남주동 재래시장으로 진입한다. 이곳에는 70년대까지 염색공장이 있었고 하수도가 흘렀다. 이곳도 성벽의 모서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길이 비스듬하다.

조흥은행 앞에 이르면 제일 큰 청남문인데 이곳 광장이 유난히 넓은 것은 청남문을 보호하던 옹성이 청남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옹성이란 독을 세로방향으로 반쯤 쪼개놓은 것 같은 형태로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보호시설이다. 철옹성(鐵甕城)이란 말은 바로 이런 형태서 나온 말이다.

조흥은행 앞에서 간선도로로 빠지는 골목길을 가다가 수성아케이드에서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트는데 이곳 역시 성 모퉁이인 까닭에 삼각지 현상이 나타난다. 청주읍성터를 왼쪽으로 돌던 오른쪽으로 돌던 그건 순전히 답사자의 자유다.  <임병무>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