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읍성은 둘레가 1640m요, 높이가 4m에 달했다. 청주 읍성의 정확한 모습이 알려진 것은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조선 정조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읍성도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읍성의 구조를 보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인데 남문에서 북문으로 큰 길이 직선으로 뚫려있고 동문과 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돼 있다. <나경준, 신라 서원경 치소 연구>
청주의 젖줄 무심천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가는데 현재의 무심천 위치보다 훨씬 안쪽으로 흘렀다. 청주 읍성은 경주 왕성을 본떠 축성되었으므로 도로망 등이 방격(方格)으로 짜여져 있는 등 계획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청주 읍성은 크게 두 구간으로 구획된다. 즉 중앙공원 일대는 충청병영이 있던 자리이며 청원군청, 구 청주경찰서는 청주목이 있던 자리인데 그 경계선은 청주우체국을 중심으로 현 족발골목으로 통하는 길 안쪽이다.
청주목은 청주목사가 집무하던 곳이며 충청병영은 충청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곳이다. 문(文)과 무(武)가 머리를 잇대며 청주목을 통치하고 방어했던 것이다. 충청병영은 충남 해미(海美)에 있다 효종 때 청주로 옮겼다.
이처럼 청주의 역사를 몸으로 말해주는 청주 읍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청주읍성도에서 보듯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더라면, 아니 반에 반만이라도 그 역사의 잔영을 붙들고 있었더라면 로마처럼 관광수입으로 시 재정을 꾸려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청주는 '천년 고도'라는 도시의 성격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성벽은 인도로 변했고 성안에 있던 맞배집, 팔작집, 초가는 왜식가옥과 서구식 빌딩으로 자리 바꿈하였다.
임란당시 청주 성 전투가 있던 자리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돌아가고 가라오케가 판을 친다. 무슨 치킨, 패스트 푸드점이 즐비하고 쇼 윈도우에선 노랑머리 마네킹이 실실 웃고 있다. 이게 어디 천년고도 청주인가. 오늘날 청주는 역사의 정체성을 잃고, 심하게 말해서 국적불명의 도시가 되었다.
이 고장 역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선 남석교와 더불어 청주 읍성 복원이 가장 큰 명제이고, 그 명제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당국과 시민의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에서는 배비장전의 무대가 되었던 제주목 관아 복원에 전 도민이 힘을 모으고 있다.
청주 읍성을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사유지 매입 등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부분적 복원 내지는 4대문 복원 정도가 현실에 부합된다. 시민의 협조를 얻어 성벽 효과를 연출하도록 개인 가옥 담장에 벽면처리를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읍성 복원의 꿈을 안고 청주 읍성 성벽을 따라 도는 미니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청주 읍성이 송두리채 망가지는 역사의 아픔 속에서도 불행 중 다행으로 청주 읍성의 옛 터가 그대로 남아 읍성 복원에 한 가닥 희망을 던저 주고 있다.
서쪽 성벽은 서문동 5거리, 속칭 족발골목 입구에 있는 청추문을 지나 청주YMCA에서 남사로를 건너 남주동 재래시장으로 진입한다. 이곳에는 70년대까지 염색공장이 있었고 하수도가 흘렀다. 이곳도 성벽의 모서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길이 비스듬하다.
조흥은행 앞에 이르면 제일 큰 청남문인데 이곳 광장이 유난히 넓은 것은 청남문을 보호하던 옹성이 청남문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옹성이란 독을 세로방향으로 반쯤 쪼개놓은 것 같은 형태로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보호시설이다. 철옹성(鐵甕城)이란 말은 바로 이런 형태서 나온 말이다.
조흥은행 앞에서 간선도로로 빠지는 골목길을 가다가 수성아케이드에서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트는데 이곳 역시 성 모퉁이인 까닭에 삼각지 현상이 나타난다. 청주읍성터를 왼쪽으로 돌던 오른쪽으로 돌던 그건 순전히 답사자의 자유다. <임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