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베란다에 봄 햇살이 몰려와 수선거린다. 오랫동안 사모하던 정인을 만난 듯 살가운 햇살을 가슴에 꼬옥 품어 보았다. 긴 겨울, 초목마다 어둠 속으로 내리던 뿌리의 상심은 밤새 산고를 치르고,푸르러지는 하늘로 봉긋이 촉을 틔워냈다. 그 戀靜에 창문 틈새를 몸부림치듯 삐져나온 햇살 한 줄기, 느닷없이 다가와 진한 키스를 마구 퍼붓는다. 여린 잎에 손가락 끝을 대기만 해도 연초록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이 가녀린 순은 어디 숨어있다 나오는 걸까?

물기 없는 푸슬푸슬한 분속의 흙을 바라보며 지난겨울 이런 저런 사유로 미처 돌보지 못했던 회한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럴 땐 내가 한 줄기 봄비였음 싶다. 조루에 물을 가득 채워 못다 한 사랑 뿌리마다 섬섬히 스며들도록 흠씬 뿌려 주었다.

저 단단한 흙 속에는 지난 가을이 스스로 썩어 이 봄날, 맑고 여린 새순으로 희망처럼 솟아올랐다. 그들이 여린 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굳은 땅을 뚫고 나오기까지 따스한 흙의 溫氣가, 봄 햇살이, 보드라운 봄비가 보듬었기에 이 세상을 향해 솟아오를 수 있었다. 그렇듯 우리는 홀로 왔지만 홀로 온 것이 아니다. 죽음의 고통을 감수한 어미의 사랑이 우리를 보듬었기에 이 자리에 머물 수 있었음이라.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회한의 뿌리에 눈물을 뿌리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괜스레 가슴이 떨렸다. 술렁이는 회춘의 설렘 때문인가? 이 봄날, 나는 철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P친구 모친의 부음소식이었다. 오랜 지병으로 모두의 애를 태우시더니 이제는 돌아 가셨단다. 문득, 다시는 깨어 날 수 없는 막막한 슬픔이 내 온 육신을 짓눌러댔다.

이 세상과의 곡진했던 삶의 끈을 미련처럼 잡고 계시다가 이제야 홀연히 놓고 영원한 안식에 드신 고인을 위해 '이젠 평안 하소서' 라고 기도 한 소절 올렸다.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길인데 이 좁은 소견엔 그 곳은 내게 있어 아주 먼 곳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바로 대문 밖이 그 곳이란다. 알듯 모를 듯...온 순서는 있는데 떠나가는 순서는 없으니 그럴 듯도 하다. 살아있다는 그것이 도대체 무얼까? 그리고 죽음 또한 무얼까?

오랜만에 喪家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그동안 내 삶이 급급했기에 친구들과 연락도 못했었는데 모처럼 만난 친구들이 정말 반가웠다. 평소 효자라고 일컬었던 P친구는 조문 와 준 친구들에게 부모님 생전에 자주 찾아뵈라고 한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어머님께 잘 한일은 하나도 없고 잘못한 일만 떠올라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단다. 자는 듯 누워계신 어머니를 몸부림치며 목메도록 불러 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더란다. 말이 없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 것이 죽음이더라고. 살았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자신에게 되묻는 P친구의 한마디가 술잔에 툭 떨어졌다. 그것은 작은 컵 속에서 아우성치다가 혀끝을 사정없이 쏘아대고는 이내 좁은 협곡을 지나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흘러 내렸다.

삶이 무언지 하루를 살아가노라 부모님께 전화 한번 못하고 살았다. 먼 곳도 아니요 지척에 계신데도 매양 소홀했다. 나는 항상 생각의 깊이가 모자라 그래서 후회도 하고, 그때마다 누에가 허물을 벗듯 허점투성이인 내안의 나를 하나씩 벗겨내고 싶어 몸살을 앓기도 했었지만 여전히 나는 삶의 불필요한 덧칠만 하고 있었다.

영원한 이별 앞에서는 모두가 너그럽다. 미움도 증오도 용서가 되고 그리하여 사랑이 움터온다. 그러나 삶 속에서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그저 미운 건 여전히 밉고 서운한건 역시 서운하고 이글거리는 욕심 앞엔 부모도 형제도 뒷전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살아가기 위해 따라야 할, 삶의 한 방편이기 때문일까!

냄새도 못 맡던 술이 오늘따라 시원스레 목을 축여 주었다. 영원한 이별 앞에서 토해내는 p친구의 회한을 들으며 나는 한 없이 울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늦은 시간에 상가를 나와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한참만에야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이 한밤은 비가 오시려는지 별도 뜨지 않아 먹장 같은데 온 세상이 불을 켜 놓은 듯 순간 환해졌다.

‘아니,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나는 목이 메여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대문 밖도 아니요 또한 먼 어느 곳도 아닌 다정스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 시점이었다. 몸부림치며 부르고 애원해도 대답 없다고 울던 p친구의 말이 또 뇌리를 스쳐간다.

지명을 향해 철없이 달려오던 길 뒤돌아보며 어머니의 가슴속을 더듬었다. 내가 숱하게 만들어 놓은 작고 큰 응어리들이 모두 따듯했다. 보드랍고 매끄러웠다. 아마도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사랑 앞에선 어떤 암석도 녹아 부드럽게 흘러내리리라.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어느 깊은 바다의 침묵보다 더 고요하고 깊었다. 볼 위로 촉촉한 물기가 떨어졌다. 별빛하나 없던 하늘로부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 산야에 동토의 어둠을 헤집고 솟아 날 노랗고 여린 싹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두 아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연장선 위에는 언제나 봄비가 소리없이 온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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