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공 이도철 학술세미나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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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공 이도철 학술세미나 열린다
  • 정홍철 기자
  • 승인 2005.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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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생문 사건의 공신 이도철의 행적을 재조명 나서
제천문화원(원장 송만배)이 세명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소장 이창식)와 공동 주관으로 ‘충민공이도철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오는 25일 오후 1시 제천시 시민회관 2층에서 열리는 이번 세미나는 제천이 배출한 충민공(忠愍公) 이도철(李道徹ㆍ1852~1895)의 행적을 올바르게 밝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대한국사 designtimesp=14970>등에는 이도철이 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춘생문(春生門)을 월장하다 실패해 참수당했다고 왜곡된 채 기록되어 있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그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충민공 이도철을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재조명하고 평가하는 학술회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날 세미나는 세명대 김정진 교수를 좌장으로 ▲세명대 이창식 교수가 ‘충민공 이도철의 순국정신과 제천’이라는 주제의 기조발표 ▲이민원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의 ‘춘생문사건 이전의 국내외 정세와 이도철’ ▲ 오영섭 연세대 연구위원의 ‘장충단의 한일의례와 이도철’의 주제발표가 이어진다. 토론자로는 허동현 경희대교수, 김형목 독립기념관 연구원, 이은숙 국가보훈처 연구원과 조규태, 이해권, 장태용씨 등이 나선다.

제천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도철의 구국정신과 복수창의 진실규명으로 제천이 나은 큰 인물이 재평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1998년 8월 14일 제천문화원 주관으로 ‘을미왜란 복수창의사 심포지움’이 개최되어 역사를 재조명 하고자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임최수에 대한 역사적 조명에 국한하여 정작 우리고장이 나은 이도철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2003년 11월 28일 이도철 관련 유물 및 사료 공람회가 제천문화원에서 열린바 있다.

춘생문사건과 이도철
고종이 평양대장으로 있던 군부협판(軍部協辦) 이도철에게 해원(解寃ㆍ분풀이)하고자 ‘칙령(勅令) 솔병내호(率兵來護) 궁성주토흉역(宮城誅討凶逆) 대조선(大朝鮮) 대군주(大君主) 함(啣) 이재광(李載胱)’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에 이도철은 시종(侍從) 임최수 등과1000여명의 친위대와 함께 복수창의(復讐倡義)를 결의코자 시도했으나 이진호의 밀고로 실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춘생문사건은 을미왜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궁궐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세력에 의해 연금당하다시피한 고종이 친미파계열 인사들에게 밀지를 내려 왕궁 밖으로 탈출하려했던 시도였다.

경복궁의 춘생문으로 쳐들어가려던 무력거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역모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록 춘생문사건이 고종의 비밀칙령에 의해 거사됐지만 임금을 사건에 전혀 관련시키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갔다. 이가 이도철이니 후에 고종은 충절을 생각하여 충민공(忠愍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장충단에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아관파천, 고종의 두 번째 탈출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왜변(乙未倭亂)이 있었다. 춘생문사건 이 후 1896 년 2월 11일 늦겨울 새벽, 경복궁 동쪽 대문인 건춘문(建春門)으로 두 대의 궁궐 가마가 빠져나왔다. 수행원이 전혀 딸리지 않은 단출한 두 대의 가마는 도성의 남쪽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긴다.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첫 발걸음은 이렇듯 은밀했다. 그러나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조선의 건양(建陽) 원년(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조선의 통치자인 대군주(고종)와 그의 후계자인 왕태자(후일의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서 황토재(지금의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인 아관(俄館)으로 들어간 사건은 극동 각국의 권력 판도와 정세를 일시에 바꾸어버린 대사건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듯 아관파천은 단순히 보면 조선의 군주가 궁궐을 버리고 한낱 조그만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구차한 사건이다. 그러나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의 군주가 자국이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고 ‘오랑캐(러시아)로서 오랑캐(일본)를 제압하는(以夷制夷) 전술’을 선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으로 러시아 공사관을 습격하여 모두 도륙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은 즉각 러시아와 일본의 전면전이 발발함을 뜻하는 것이기에, 일본으로서는 일절 손을 댈 수 없다는 점을 냉철하게 계산한 고종의 치밀한 전술이었다.

아관파천으로 한동안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후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1904년(광무 8) 러ㆍ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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