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군<3>

신단양에서 북쪽으로 남한강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남한강물 한 가운데 산봉우리같은 바위 세 개가 우뚝 솟아 있는데 바로 도담삼봉이다. 가운데 바위가 중봉이고 남쪽으로 교태를 부리듯 서 있는 봉우리가 첩봉, 외면하듯 돌아앉아 있는 북쪽 봉우리가 처봉이다. 가운데 있는 중봉 중턱에는 영조 42년(1766)에 단양군수 조정세가 처음 능영정(凌瀛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는데, 지금의 것은 1976년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도담삼봉에 큰 애착을 가졌는데,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온다. 고려 중엽 큰 장마로 강원도 정선 땅에 있던 산봉우리 세 개가 도담리로 떠내려왔다.

▲ 도담삼봉 전경, 왼편부터 처봉, 중봉, 첩봉이라고도 불린다. 유람선을 타고 주변관광을 즐길 수 있다. 강원도 정선 관아에서는 이 바위를 찾으러 다니다 도담리에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곳 사람들에게 매년 세금을 받아갔다고 한다. 단양 사람들은 소용도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했지만 계속해서 내오던 것을 하루아침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린 소년이 세금을 받으러온 정선의 관리에게 이곳에 있는 삼봉이 정선에서 떠내려 온 것이라면 우리가 떠내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제멋대로 떠내려 온 것인데 우리에겐 소용이 없으니 그렇게 중한 것이라면 도로 가져가시오. 라고 말했다. 이에 정선의 관리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고, 그 이후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어린 소년이 바로 삼봉 정도전이라고 한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권근·이존오 등과 어울려 경서·사기에 대해 토론하며 지식을 넓혔는데, 특히 삼봉은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밝았다. 공민왕 11년(1362)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충주사록에 임명되어 관직을 시작한 후 방원과 방석의 왕위싸움에 말려들어 방원을 죽이려 한다는 오해를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기까지 36년 동안 파란많은 역정을 보냈다. ▲ 김홍도가 그린 도담삼봉
정도전은 충주사록에 임명되었다가 공민왕 15년(1366) 부모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4년 동안 부모상을 치르면서 삼봉과 영주에서 학문과 후세교육에 힘썼다. 이 때 조선을 이끌어 나갈 정치이념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각종 서적을 탐독했고 정독했다. 정몽주 선생이 보내준 맹자를 하루 1장, 또는 반 장 이상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우왕에게 대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때는 고려 조정에서 친명파와 친원파의 대립이 심했고, 사상적으로도 억불숭유(抑佛崇儒)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에 정도전은 불교적인 관념사회를 유교적인 현실사회로 이끌어 가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귀양 당시 쓴「심문천답」,「심기리편」,「불씨잡변」등의 내용은 당시 사회병폐가 불교의 비현실적인 풍조 때문으로, 유교적인 이념만이 사회를 혁신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주자학 이념에 기반을 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만한 인물을 찾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성계였다.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죽이고 권력을 잡자 정도전은 우군총제사가 되어 친원파를 몰아내고 조선 개국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 그루 소나무에 비유하며 이성계에게 개국에 참여 의사를 비쳤다는 시가 한 수 전해온다. 황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인가 다른 해 서로 만나 뵐 수 있으리까사람 사는 서리에서 곧 따라 쫓으리이다공양왕 2년(1390)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할 의향이 없음을 밝히고 돌아왔다. 그러나 삼봉은 그의 급진적인 사상과 주저 없는 대담한 성격으로 인하여 구세력인 정몽주에게 몰려 다시 봉화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한 때 풀렸으나 다시 예천옥에 갇혔고,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에야 다시 풀려나 조선의 개국에 앞장섰다.

   
▲ 삼봉정도전선생 숭덕비
태조 2년(1394)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여 뜻을 이루자, 모든 제도를 새롭게 하여 국가기틀을 다졌다. 이 해「조선경국대전」을 지어 조선의 문물제도를 새롭게 만드는데 공헌하였고 다시 이듬해 정총(鄭摠)등과 더불어 『고려사』 37권을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 태조 6년(1398) 조선에서 올린 글이 명나라를 업신여기는 문구가 있다 하여, 명나라가 그 글을 쓴 공부·윤순 등을 명나라로 보내라고 하자 정도전은 명나라가 조선을 너무 업신여긴다고 분개하여 명나라를 칠 것을 주장하고 군사훈련과 군량미 비축에 힘을 기울이다가 태자 방석과 방원의 왕위 계승 싸움에 말려 방원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삼봉 정도전은 여말선초 격동기 속에서 자신의 혁신적인 사상을 펼쳐 조선의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한 사상가요, 정치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즉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꼭 필요했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단양읍내로 들어가는 상진리 근린공원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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