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의 명칭이 신륵사라고 불리게 된 것은 확실치 않다. 다만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부터라고도 하며, 또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라고도 한다. 당시 이 절에는 수경대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득도를 하고 절에 내려와 있던 고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데 이 때 절 아래 월악일대에 괴질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에 걸려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이는 스님을 시기한 귀신의 짓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스님이 수경대에 오르더니 병풍바위에 숨어있던 귀신을 잡아 코를 꿰어 항복을 받으니 괴질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때부터 신륵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정말이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륵사 극락전에서 바라보는 단풍은 아침 햇살에 오색의 빛을 반짝이며 사람들의 가슴을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월악산 신륵사에는 극락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국사당, 요사채, 삼층석탑(보물 제1296호), 당간지주, 산신각 등이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일컫는 말이다. 극락이란 ‘즐거움이 있는 곳’이란 뜻으로 안양(安養)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의 불토를 지난 곳에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추어진 이상향인 극락정토가 있는데, 고해의 바다에서 번뇌하는 중생이 부처의 가르침을 쫓아 열심히 염불하며 정진하면 죽어서 이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는 일반 중생들에게 사후의 행복한 생활을 제시함으로써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세계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절집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법당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조선 후기 목조건물이며 정면 3칸(11m), 측면 3칸(8m), 높이 9m, 면적 21평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고색이 넘치는 건물이다. 맞배지붕이면서도 공포를 다포로 처리한 것이 특징인데, 1960년 일부를 중수했으며 기둥은 느티나무를 썼다고 한다.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면 불단 위에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자대비를 긍극적인 수행목표로 삼고있는 관세음보살좌상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지혜의 문을 맡고 있으며 삼도 중생을 제도하는 무상한 힘이 있다는 대세지보살좌상이 협시한 삼존불이 있으며, 내부에는 신장도 2점, 대자재제석도, 십육존좌도, 범왕제석도, 나한도 4점의 탱화가 걸려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나 보살의 손이나 손가락의 특정한 모습을 인상(印相)이라고 한다. 인(印)은 세존의 내증, 서원, 공덕의 표지이므로 불변하는 것이며 손가락을 꼬부리기도 하고 여러가지 물건을 잡기도 한다. 손가락을 꼬부리는 것을 수인(手印)이라 하고 물건으로 인을 표시하는 것을 계인(契印)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좌상은 전체높이 114㎝, 어깨넓이 43㎝이며, 인자하면서도 힘있어 보이는 대세지보살좌상은 높이 110㎝, 어깨넓이 40㎝이다. 조성연대는 관음상이 1960년이며, 세지보살상은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삼존불 뒤로는 아미타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1987년에 조성한 지장탱화, 칠성탱화,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천장 가운데에는 용을 비롯한 여러 모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벽면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고색창연한 그림을 비롯해서 천동, 천녀 주악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주악상을 중심으로 잉어인 듯한 30여 마리의 물고기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색다르다. 천장 가운데의 네 귀에는 네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기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천장을 화려하고 현란하게 장식하는 이유는 법당은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여래불이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법화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던 꽃의 환상과 신비를 법당 안에 재현하기 위함이다.
극락전 왼쪽 바깥 처마 아래에는 1960년에 쓴 「월악산신륵사중수기」가 걸려 있다. 극락전 바깥벽은 다양한 벽화가 있다. 건물 외벽 오른쪽 상단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는 장면인 「선유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비롯해서 아미타도, 관음도, 달마대사도, 반야용선도 등이 그려져 있다. 한편 외벽 풍판 안쪽의 천판에는 커다란 물고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내용은 큰 물고기가 중간물고기를, 중간물고기가 작은물고기를 잡아 먹는 모습인데, 이 그림은 석가모니의 전생설화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 석가탑을 옮겨놓은 것처럼 정교하고 간결하며 장중한 아름다움과 비례가 잘 맞는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높이가 4m이며, 1.46m의 정방형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찰주 등이 완전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같은 예는 다른 탑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방향이 극락전 정면과 약간 어긋나 있어 조화스럽지 못한 점으로 보아 극락전과 다른 시기에 조성되었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이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1년 4월 해체 복원하던 중 석탑의 기단부에서 소형 토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은 금동편과 동편으로 그 양식은 서로 다르다. 소형 토탑은 높이 3.5∼5㎝의 방형다층탑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흙을 빗고 선을 그어서 탑층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 국사당은 월악산 삼봉쪽을 바보며 절을 지키고 있는데, 맞배지붕에 사방 한칸의 규모로서 안에는 작은 보살상과 중앙의 신령, 좌우에 어린 남자와 여자가 신령을 모시고 있는 탱화 한폭이 봉안되어 있다. 또 절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지점에 1984년 무렵까지만 해도 부도 2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1기만 남아 있으며, 삼층석탑, 극락전, 괘불대 등 역사가 오래된 문화재와 사지가 넓으면서도 아늑하여 과거 수도장으로 신륵사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세가 몹시 기울었는데 근래에 들어 국사당, 산신각을 새로 지으면서 예전의 면모를 되찾아 가고 있다.
현재 국사당에는 ‘局師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국가에서 내리던 최고의 승계인 국사(國師)의 의미와 절을 수호해 주는 신에게 제사를 제내는 국사단(局司壇)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는데 국사당이 전해오는 내력과 내부에 봉안된 탱화로 보건대 국사단(局司壇)으로서의 의미가 더 맞지 않나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