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츠보다 위대한 청주인의 긍지 <황규호>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세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이 든 금속 활자 책으로, 세계기록 유산에 올라있다.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雲泉洞)의 흥덕사(興德寺) 옛 절자리에는 새로 말끔히 지은 탑과 금당(金堂)이 하나씩 있다. 지난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이 지금 가람(伽藍)이 들어선 절자리 발굴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사실은 이름이 없는 이른바 일명사지(逸名寺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발굴을 하는 동안 옛 흥덕사 절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오늘의 가람을 그 자리에 지었다. 우리가 흥덕사를 주목하는 까닭은 따로 있다. 그것은 가람이 아니다. 보다 진보한 문명을 향해 채찍을 휘두른 한 개체문화(個體文化)의 큰 반란이 거기 흥덕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 2001년 9월 4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인증서
그 흥덕사의 반란은 마침내 인쇄문화의 대혁명을 일으켰다. 금속활자로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秒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고향이 바로 흥덕사였던 것이다. 지금부터 『직지심체』로 줄여 쓰고자 하는 그 불서는 오로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기도 하다. 책 끄트머리 간기(刊記)에 '선광7년정사7월 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 (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 청주 교외 흥덕사에서 놋쇠활자로 인쇄했다는 이야기다. 이어 『직지심체』를 펴내는데 도움을 주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일컫는 연화문인(緣化門人) 석찬(釋璨)과 달담(達湛), 시주를 한 비구니 묘덕(妙德)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 제5차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국제자문위원회 회의. 이 회의에서 『직지심체』의 인쇄문화사적 가치가 인정되었다.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심체』는 모두 상ㆍ하권 두 권이다. 그 가운데 하권만이 남아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한 하권은 그나마 첫장이 떨어져 나가 온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세계의 서지학자(書誌學者)들이 『직지심체』를 중시하고 있다. 내용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쇄문화를 혁명으로 바꾼 유일한 물증이라는 점 때문에 학자들이 관심을 두는 것이다. 내용으로 말하면, 흥덕사 금속활자본이 나온 다음해인 1378년에 목판본(木板本)으로 찍은 『직지심체』가 전해 내려온다. 경기도 여주땅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목판본 상ㆍ하 1책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직지심체』는 흔히 백운화상이라 부르는 고려말의 고승 경한선사(景閑禪師)*가 입적하기 2년 전에 직접 쓰고 엮은 수교본(手校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세계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의 산실인 흥덕사지 아래 자리했다.

『직지심체』를 금속활자로 찍어낸 흥덕사는 얼핏 백운화상과 인연이 닿지 않은 절로 보인다. 그러나 책 끄트머리에 법명으로 나오는 석찬이 그의 문도이자 시자였음을 고려하면, 문중의 절일 수도 있다. 그가 머무르다 입적한 여주땅 취암사를 두고 굳이 청주에서 『직지심체』를 금속활자로 먼저 찍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책을 만드는데 들어갈 돈을 거두는 일, 모연(募緣)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복원된 흥덕사금당. 청주는 나말(羅末)부터 서원경(西原京)이었고, 1018년 고려가 전국에 팔목(八牧)을 설치하면서는 청주목이 되었다. 전국 8대 행정도시의 하나였던 청주지역에는 선종(禪宗) 사찰이 많았던 모양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를 찍기 28년 전인 1349년에 왕실에서 작성한 이두문(吏讀文) 고문서에는 청주목의 몇몇 선종사찰 이름이 나온다. 흥덕사 역시 선종사찰이 분명하다. 그래서 흥덕사는 청주목 선종 사찰의 호족층 신도들을 후원자로, 절에서 놋쇠활자로 인쇄한 책 사주본(寺鑄本)을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 직지 상ㆍ하권을 복원한 무형문화재 금속활자장 오국진씨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 흥덕사에서 찍은 『직지심체』의 기록이 없었거니와, 흥덕사 절을 아는 이가 또한 전무했다. 어떻든 소중한 우리의 것을 모두 잊고 사는 사이 『직지심체』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만국박람회에서도 조선관에 내놓은 최고의 금속활자본을 알아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 다음해 1901년 『조선서지 朝鮮書誌』보유판(補遺版)에 『직지심체』 해설의 글을 쓴 모리스 꾸랑(1865~1935년)과 서울에 주재하면서 많은 책을 수집한 프랑스 공사(公使) 꼴랭 드 쁠랑시 (1853~1922년)* 정도가 그 가치를 알았을 것이다. 모리스 꾸랑의 『조선서지』보유판 서문에 따르면 『직지심체』가 서울로부터 파리에 도착한 것은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바로 그 해였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전시장 내부. 우리는 모리스 꾸랑의 글을 보고 나서『직지심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뒤늦은 자각이었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은 만국박람회 이후 일흔 두 해만에 『직지심체』실물을 전시장에 내놓았다. 지난 1972년 유네스코(UNESCO)가 설정한 '세계 도서의 해'를 맞아 특별전을 열면서 실물을 유리상자에 넣어 공개했던 것이다. 그 특별전은 유럽을 비롯한 세계인들에게 인쇄문화상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금속활자본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런 사실을 세계서지학계와 유네스코로부터 공인받는 계기도 되었다. 독일 마인츠의 시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400~1468년)가 금속활자를 처음 만들어 책을 찍었다고 믿었던 유럽인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그의 첫 금속활자 인쇄물은 『세계심판 世界審判』으로 알려졌다. 그 뒤에 『사십이행성서 四十二行聖書』를 금속활자로 간행했다. ▲ 1985년 택지조정 중 발견된 쇠북. 이 금속공예품에 든 새김 글씨는 『직지심체』의 산실 흥덕사를 찾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당시 구텐베르크가 창안한 금속활자인쇄술을 '검은 기술'이라는 말로 찬탄했다. 그러나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과 로마문자권에서는 우선 활자 제작공정에서 큰 차이가 난다. 그것은 사람의 말뜻을 글씨로 나타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와 말소리를 그대로 적는 표음문자(表音文字)의 차이기도 하다.

로마자는 20여자에다 온갖 부호(符號)를 다 끌어들여도 100자가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비해 한자문화권에서는 수 천자에서 1만여 자가 넘는 글자가 필요하고, 글자 생김새도 무척 복잡하다. 그런 활자제작의 어려움과 활자배열의 번거로움을 이겨내고 금속활자로 찍어낸 세계 최고의 인쇄본 실물이 바로 흥덕사의 『직지심체』다.

그러나 책의 산실이자 고향이었던 흥덕사는 간기에 나온 기록 말고는 어디서도 찾지 못했던 잃어버린 절이었다. 그 잃어버린 절이 다시 다가왔다. 1985년 택지조성을 위한 긴급구제발굴에서 '흥덕사'새김글씨가 든 놋쇠북 청동금구(靑銅禁口) 따위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절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났던 것이다. 또 '대중3년(大中三年)' 새김글씨가 든 기와를 거두어 늦어도 9세기 쯤에 절을 지었고, 고려말에는 이미 불타버렸다는 폐사의 시기도 가늠하게 되었다.

   
▲ 청주고인쇄박물관 내부. 금속활자인쇄 과정을 밀납인형으로 재현했다.
가람은 남북 중심축에 중문(中門)과 탑ㆍ앞쪽 5칸 옆쪽 3칸씩 금당과 강당(講堂)을 배치한 형식이었다. 그리고 금당 좌우에다 앞쪽 12칸 옆쪽 1칸씩의 동서회랑을 두었던 흔적도 확인했다. 그 흥덕사 절자리 발굴은 『직지심체』의 뿌리를 밝혔을 뿐 아니라, 금속활자본 최고의 자리를 요지부동하게 굳혀 주었다.

그 흥덕사 옛 터전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축제가 열린 적이 있다. 지난 2000년 가을 마인츠 시민보다 위대했던 옛 청주인 후손들이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를 흥덕사 언저리에서 열었다. 디지털시대의 정보문화를 공유한 그 새로운 세기의 박람회에서 세계인들은 책의 역사 속에 혜성처럼 나타난 첫 발명이 무엇인가를 가슴으로 느꼈다. 지금이라도 흥덕사 절자리를 찾아가면, 그런 인쇄문화혁명의 그림자가 보일 것이다. 비록 영인(影印)이기는 하지만, 절 아래 청주고인쇄박물관에는 『직지심체』가 있다. 그리고 인쇄문화의 모든 것을 디오라마와 함께 보여주는 전시공간도 마련되었다.  <황규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고려 말의 고승 경한(景閑)이 1372년에 직접 써서 엮은 수교본을 바탕으로 한 불서다. 부처와 조사들이 교리를 운문(韻文)으로 나타낸 게(偈)나, 공덕을 기린 송(頌) 따위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부분을 뽑아 적었다. 책의 중심주제인 '직지심체'는 사람이 마음을 바로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 된다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을 줄인 것이다.

*경한선사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나 어려서 출가했다. 스승이 없이 여러 절에서 수행하다 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10년을 머물렀다. 거기서 지공(指空)에게 법을 배우고, 석옥(石屋)에게서는 법맥을 전해 받았다. 고려로 돌아와서 1365년 나옹(懶翁)의 천거와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노국공주의 원찰(願刹)인 흥성사(興聖寺) 등에서 주지를 지냈다. 그는 세수 일흔 일곱으로 삶을 거두는 순간에 남긴 임종게(臨終偈)에서 "이르는 길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 했다. 선교(禪敎)일체를 주창한 고승이기도 하다.

*꼴랭 드 쁠랑시
구한 말  프랑스 공사로 서울에 주재하는 동안 전문가를 시켜 엄청난 분량의 조선서책을 수집했다. 모리스 꾸랑의 『조선서지』로 그의 수집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서책 대부분은 두 사람의 모교인 파리 동양어학교로 들어갔다. 그런데 『직지심체』는 다른 서책 832점과 함께 파리 드루오호텔 경매장에서 보석상 앙리 베베르(1854~1943년)가 사들였다. 그 뒤 1950년 쯤 앙리의 상속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넘겨주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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