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恨에 봄을 잃은 ‘능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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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恨에 봄을 잃은 ‘능월리’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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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주 육종관씨 땅 토지분배 농민 8년간 민사소송
62년 대법원 패소, 지주 변호사는 대법원장 임명돼
지난 2000년 9월 <옥천신문>은 기획시리즈 ‘발굴 옥천현대사’를 통해 주목할 만한 지역민원을 보도했다. 특히 문제의 주민민원은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 소유 토지와 관련된 것이어서 관심이 집중됐다. 해방이후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면서 대지주인 육종관씨의 토지를 유상분배받았던 농민들이 한국전쟁중에 ‘강제로 빼앗겼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나선 것. 해당 농민들은 휴전직후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해 청주지법에서 1심 승소했으나 2심과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지금까지도 수백장의 소송서류를 보관한 채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하고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농민들은 바로 옥천 육씨 목사공파 세거지인 청성면 능월리 주민들이다. <옥천신문>의 보도기사를 바탕으로 토지분쟁의 내막을 정리해본다.

   
▲ 지난 62년 능월리 주민들의 ‘화해조서무효소승’을 주도 했던 이해준 이장(70)
지난 93년 7월 옥천군 청성면 능월리 이해준씨(70)를 비롯한 5명의 농민이 청와대 민원실과 옥천군에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진정서는 농민들이 해방 후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대지주인 고 육종관씨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유상분배받은 과정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정부가 정해준대로 5년간 땅값을 상환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분쟁에 휘말려 다시 토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진정인들은 해방직후 잠시나마 토지를 소유했던 농민들의 아들세대였다. 땅에 맺힌 부모의 한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자식들이 40년만에 다시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었다.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토지개혁이 시행된다. 남한에서는 지주에게 3정보까지만 토지 소유를 허용했고 종중 명의의 위토(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토지)는 묘지 1기당 600평까지 제외시켜줬다. 정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에 따라 지주로부터 땅을 사서 소작농민들에게 되팔았다. 일제때부터 지주인 육종관씨의 농경지를 소작했던 청성면 능월리 농민들도 토지를 분배받고 연수확량의 150%를 5년간 상환했다. 상환을 끝낸 농민들은 54년부터 55년에 걸쳐 소유권이전을 받아 등기문서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상환액을 갚던 일부 농민들이 지주측에 다시 땅을 내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지주측에서는 정부가 토지분배를 시행한 토지가 선대로부터 내려온 위토이기 때문에 내줄 수 없다며 문서에 도장을 찍도록 농민들에게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카빈총을 메고 와서 경찰서에 가두겠다는 협박도 했다는 것. 특히 능월리 농민 가운데 인민군 의용군에 징용됐거나 부역요구에 응했던 집에서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지주측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에대해 능월리 이해준 이장(70)은 “나도 열댓살 땐데, 그쪽 집안사람들이 경찰도 있고 하니까, 동네에서 눈에 띄면 협박을 했어요. 인민군 의용군 보냈거나 부역했던 집에서는 해꼬지가 무서우니까 할 수없이 도장을 찍어준 겁니다. 그 사람들 설치는 위세에 우린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당시 도장을 찍어준 농가는 10여곳에 달했으나 전쟁직후 54년 육씨측에서 청주지법에 제기한 ‘포기증서 확인청구소송’에 피고소인이 된 농민은 9명이었다. 주민들은 백지에 도장을 찍었을 뿐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이 소송에서 청주지방법원은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주지법은 농민들이 분배받았던 토지가 지주인 육씨 문중의 위토라 해도 농민들의 상환이 끝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소유권이 국가에 있기 때문에 경작자들이 얻은 분배권을 지주에게 반환했다 해도 실제로 분배권자인 국가에 반환하는 옳다고 판시했다.

육씨측에서는 고등법원에 항소했고 피고인 농민들은 대리인을 내세워 응소했지만 느닷없이 원고측과 화해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해준이장은 “글도 제대로 모르는 농민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김모씨가 몰래 화해조서를 작성하는데 도장을 사용한 겁니다. 농민들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말소하고 토지 소작권은 박탈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결국 스스로 땅을 내준 꼴이 된 겁니다. 김씨가 달아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됐고 할수없이 법원에 ‘화해무효확인소송’을 냈습니다”?
농민들은 변호사 자격도 없는 대리인 김씨가 꾸민 화해조서를 항소심 법원에서 인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주장이었다. 상식적으로도 1심에서 승소한 농민들이 순순히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1962년 대법원은 고등법원에서 제출된 화해조서를 그대로 인정, 농민들은 소송 8년만에 패소하게 됐다.

주목할 점은 대법원의 판결시점이 박정희 소장의 5 16쿠테타가 성공한 이듬해라는 시점이다. 또한 고법에서 지주측 변호인으로 농민들의 화해조서 작성을 이끌었던 조진만 변호사는 쿠데타 1개월뒤인 61년 6월 대법원장에 전격 임용됐다. 결국 문제의 화해조서를 만든 당사자가 대법원장으로 재임중인 상황에서 대법원의 소송이 진행된 것이다. 조변호사는 박대통령의 재임용을 통해 68년까지 대법원장으로 장수하게 된다.

이에대해 이해준이장은 “5 16 나구 그쪽 변호사가 대법원장됐다는 얘길듣고, 우리는 소송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설사 소송에 졌다해도 그동안 국가에 낸 토지 상환액은 돌려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해마다 꼬박꼬박 소작료를 내고 있어요. 지금 정부에서 과거사 바로세우기를 한다는데 우리 억울한 것 좀 조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해당 농민들의 후손은 지난 93년 문민정부 출범직후 청와대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진정서를 다시 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법원 판결이 난 지 43년이 지난 지금, 이제 능월리 농민의 한은 손주들에게 대물림될 처지가 됐다. 농민의 가슴속에 얼어붙은 땅, 능월리의 봄은 영원히 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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