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단발령(斷髮令)을 내린 해는 고종32년이던 1895년이었습니다. 국정개혁에 주력하던 김홍집내각은 조선 개국 504년 11월17일을 역법(曆法)을 바꿔 양력 1월 1일로 변경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斷髮令)을 선포했습니다.

“짐이 머리칼을 잘라 신민에게 모범을 보이니 백성들은 짐의 뜻을 좇으라”며 황제는 솔선하여 머리를 자르고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에 나가 강제로 백성들의 상투를 짧게 자르게 했습니다.

단발령은 청천벽력이 되었고 전국은 이내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은 머리카락 한 올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之始也)의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백성들은 수 천년을 이어온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은 민심이 들끓었고 곡소리가 메아리쳤습니다. 유생(儒生)들은 의병을 일으켜 집단으로 저항했고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은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는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며 목숨마저 내 놓고 반발하다 투옥되었습니다.

결국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에서 군중들에게 짓밟혀 목숨을 잃었고 급기야 내각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다’하여 내려진 단발령은 그처럼 온통 나라를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개혁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필연적으로 저항을 부릅니다. 옳든 그르든 전통에 길들여진 사회구성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반발이 거세기 때문입니다. 단발령은 그것을 웅변으로 증명한 이 나라 근대사의 큰 사건입니다.

오늘의 시각에서 돌아보면 당시 단발령에 대한 혼란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국모(國母)가 시해되는 치욕 앞에서는 정작 말 한 마디 못하다가 고작 터럭의 문제로 온 백성이 들고 일어섰으니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날 상투를 틀어 매고 망건에 탕건을 쓰고 일년 열두 달을 지낸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근질근질 해 질 것입니다.

여성계의 오랜 숙원이던 호주제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우리 역사는 2005년 또 하나의 ‘기념비적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폐지 반대론자들이 “전통적 가족개념의 해체”라며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지만 기존의 일방적인 남성 중심적 가족제도가 양성 평등적 가족제도로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있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개혁은 그래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전통은 천년 만년 이어져야 하지만 부조리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낡은 가치관을 지양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진취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호주제 폐지가 그러한 사고의 출발이기를 나는 믿고자합니다. 역사는 흐릅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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