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1> - 단양군<2>

▲ 향산리 삼층석탑.옥계석의 처마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붉은 아치가 아름다운 신단양 고수대교를 건너 33번 영월 방면으로 달렸다. 신라 눌지왕(417∼458) 시절 묵호자가 세웠다는 향산사의 향산리 삼층석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고습재를 넘어 가곡에서는 고은골감자축제로 온 마을이 잔치마당이었다. 향산리 삼층석탑은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 있다. 향산리 마을입구에 서있는 마을자랑비에는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탑은 도굴로 해체된 것을 1935년 주민들이 복원하였으며 높이 4m, 기단폭 1.8m, 석재는 화강암으로 형태가 우수 단정한 귀중한 문화재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향산리 삼층석탑은 마을 한가운데 서 있었다.말끔하게 꾸며진 탑 주변은 집들이 들어서 있어 예전에 절이 있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탑은 두 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부가 올려진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보물 제405호로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이 탑은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이며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1935년경에 누군가가 석탑 내의 보물을 도굴하기 위해 탑신부를 쓰러뜨렸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현재 2, 3층의 옥개석 전각부에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상륜부까지도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 석탑 옥신의 감실
석탑의 구조는 상하 2층으로 구성된 기단위에 삼층의 탑신부를 놓은 전형적인 석탑으로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반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5매석으로 된 지대석을 구축하였으며, 이 위에 하층기단 면석을 놓았다. 하층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가 마련되고 중앙에는 탱주 1주씩이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4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이루었으며 상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대로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한 쪽면을 2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으므로 모두 8매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쪽 우주와 중앙의 탱주 1주씩이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상층기단 각석은 2매의 판석으로 결국하였는데 아랫면에는 부연이 모각되고 윗면 중앙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다. 3층의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층의 옥신석에는 양쪽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그리고 초층 옥신석에서만은 남쪽면 중앙 하부에 문비형이 모각되었는데 너비 62㎝, 길이 40㎝로 이중 액권이며 이것을 다시 음각단선으로 너비 13㎝씩 양분하여 문짝을 표시하였다. 각 층의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4단씩이고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굄을 각출하여 그 윗층의 옥신을 받고 있다.

   
▲ 향산리에서 발견된 6.2cm 높이의 금동관음보살상.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의 반전도 경쾌하여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 이상의 복발, 보륜, 보주 등 각 부재가 1석씩으로 조성되었다. 탑신부의 최감률은 1층과 2층의 옥신이 3 : 1의 감축을 이루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고 옥개석의 경쾌한 모습으로 볼 때 안정되고 세련된 모습이다.

기단부가 상하 2층 기단의 정연한 형식이고 특히 탑신부에 있어서 각층 옥신굄이 각각 2단씩이며 경쾌한 옥개석의 조성수법 등 각 부의 건조양식과 결구수법으로 보아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신라 하대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에서 특기할 것은 죽령 넘어 북쪽에 위치한 신라석탑이라는 점과 석탑 자체의 구성에 있어서 상층기간의 면석이 8매석으로 조립된 점, 초층옥신 남쪽면에 문비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석탑의 형태도 우수하고 비례도 충실하며 석재결구도 정제된 단정한 신라 석탑이다.

1. 향산리삼층석탑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붉은 아치가 아름다운 신단양 고수대교를 건너 33번 영월 방면으로 달렸다. 신라 눌지왕(417∼458) 시절 묵호자가 세웠다는 향산사의 향산리 삼층석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고습재를 넘어 가곡에서는 고은골감자축제로 온 마을이 잔치마당이었다. 향산리 삼층석탑은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 있다. 향산리 마을입구에 서있는 마을자랑비에는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탑은 도굴로 해체된 것을 1935년 주민들이 복원하였으며 높이 4m, 기단폭 1.8m, 석재는 화강암으로 형태가 우수 단정한 귀중한 문화재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향산리 삼층석탑은 마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말끔하게 꾸며진 탑 주변은 집들이 들어서 있어 예전에 절이 있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탑은 두 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부가 올려진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보물 제405호로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이 탑은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이며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1935년경에 누군가가 석탑 내의 보물을 도굴하기 위해 탑신부를 쓰러뜨렸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현재 2, 3층의 옥개석 전각부에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상륜부까지도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석탑의 구조는 상하 2층으로 구성된 기단위에 삼층의 탑신부를 놓은 전형적인 석탑으로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반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5매석으로 된 지대석을 구축하였으며, 이 위에 하층기단 면석을 놓았다. 하층기단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각 면에는 양쪽에 우주가 마련되고 중앙에는 탱주 1주씩이 모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은 4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이루었으며 상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대로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한 쪽면을 2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으므로 모두 8매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쪽 우주와 중앙의 탱주 1주씩이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상층기단 각석은 2매의 판석으로 결국하였는데 아랫면에는 부연이 모각되고 윗면 중앙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다. 3층의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층의 옥신석에는 양쪽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그리고 초층 옥신석에서만은 남쪽면 중앙 하부에 문비형이 모각되었는데 너비 62㎝, 길이 40㎝로 이중 액권이며 이것을 다시 음각단선으로 너비 13㎝씩 양분하여 문짝을 표시하였다. 각 층의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4단씩이고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굄을 각출하여 그 윗층의 옥신을 받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의 반전도 경쾌하여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 이상의 복발, 보륜, 보주 등 각 부재가 1석씩으로 조성되었다. 탑신부의 최감률은 1층과 2층의 옥신이 3 : 1의 감축을 이루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고 옥개석의 경쾌한 모습으로 볼 때 안정되고 세련된 모습이다. 기단부가 상하 2층 기단의 정연한 형식이고 특히 탑신부에 있어서 각층 옥신굄이 각각 2단씩이며 경쾌한 옥개석의 조성수법 등 각 부의 건조양식과 결구수법으로 보아 이 석탑의 건립연대는 신라 하대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에서 특기할 것은 죽령 넘어 북쪽에 위치한 신라석탑이라는 점과 석탑 자체의 구성에 있어서 상층기간의 면석이 8매석으로 조립된 점, 초층옥신 남쪽면에 문비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석탑의 형태도 우수하고 비례도 충실하며 석재결구도 정제된 단정한 신라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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