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선(巨船) 청주호의 무쇠돛대 <황규호>


▲ 국부 제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 오늘날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에 자리한 철당간은 서기 962년에 지은 것이다. 당간은 배의 돛대를 가리키기 때문에 범장이라고도 한다. 청주는 통일신라시대 서원소경(西原小京)때부터 얼마만큼 터전을 닦아놓은 고대도시에 뿌리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뒤를 이은 고려도 이름은 청주로 바꾸었지만, 도시의 면모를 더 낫게 가꾸어 나갔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동네나 온 고샅이 다 고르지는 않았을 지라도, 그리 덩치가 크지 않은 평지의 도시였으리라. 은성(殷盛)하는 도시는 아직 아니었기 때문에 고을을 감도는 분위기는 적연(寂然)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듯 조용하여 조금은 쓸쓸했을 거리에서 범종의 맥놀이 울음소리를 들었다면, 누구나 다 평심(平心)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범종이 울었다. 그 오묘한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청주 한 가운데 가람 용두사(龍頭寺)였다.그러나 지금 청주에 용두사는 없다. 다만 철당간(鐵幢竿)하나가 절자리를 지켰다. 쇳물을 틀에 부어 찍어낸 원기둥(圓筒)을 쌓아올려 지은 쇠짐대가 철당간이다. 그 철당간은 용두사를 아주 분명하게 일러주는 가람의 푯말같은 것이었다.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41호에 오른 문화유산이기도 했다. 오늘날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에 있다. 애초 높이는 30단 60자, 그러니까 18m나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 10단이 없어져 키가 13m로 줄었다. 그 숱한 변란의 틈새에서 무쇠인들 온전했을까만은 다행히도 지은 시기와 내력을 적은 당간기(幢竿記)가 세 번째 원기둥 거죽에 들어있다.모두 393자로 이루어진 당간기는 용두사의 존재와 지은 시기를 분명하게 일러준다. 그 당간기에서는 우선 고려 광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시기를 스스로 만들어 표시한 독자의 연호(年號) '준풍'(峻豊)이 보인다.TV드라마 '제국의 아침'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태조 왕건의 세 째 아들이 그 임금인 데, 준풍 3년에 용두사에다 철당간을 지었다는 내용이 돋을새김한 당간기에 들었다. 그리고 보면, 준풍 3년인 서기 962년 이전에 용두사가 이미 청주에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다. 용두사는 적어도 12세기 말까지 불사를 계속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근거는 『여지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청주의 어떤 사람이 태안 7년에 제작한 용두사금구(龍頭寺錦口) 새김글씨가 보이는 옛날 종을 땅속에서 주웠다."는 것이 『여지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줄거리다. '태안'은 중국 요(遼)나라 도종의 연호이고, 그 7년은 서기 1100년 이다.그런데 『여지도서』등 읍지류가 보살사에 소장되었다고 밝힌 용두사 금구는 행방이 묘연하거니와, 그 뒤에는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용두사와 인연을 가진 유물은 오로지 철당간 뿐이다. 고려 초기의 역사를 곱씹어 볼 수 있는 당간기에는 철당간을 지은 사연이 절절하다. 철당간을 짓기 위해 원력(願力)을 세운 이는 청주의 호족(豪族) 김예종(金芮宗)이다. 그는 돌림병을 고치기 위한 불사(佛事)의 하나로 철당간 짓는 일을 서둘렀으나, 끝을 못본 채 눈을 감았다고 한다. 김예종은 당대등(堂大等)이라는 고유의 직능을 가진 호족이기도 했다. 불사는 그의 사촌형 김희일(金希一)손에 마무리 되었다. 당간기에는 학원경(學院卿)과 학원랑중(學院郞中)같은 교육과 맞물린 고유한 직책도 적혔다. 그것은 당간을 지은 청주김씨(淸州金氏)일가가 통일신라 서원경 때부터 시작했을 청주지역 학원에도 깊이 간여한 것을 뜻하는 대목이 아닌가한다.그 철당간을 배에 단 돛배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청주의 고적을 소개하면서 철당간을 동장(銅檣)으로 적었다. 당간을 다른 말로 하면 돛대를 가리키는 범장(帆檣)이니, 거무레한 무쇠를 녹이 난 구리로 보았을 뿐 여전히 돛대는 돛대다. ▲ 고려의 독자연호인 ‘준풍’이 명기된 철당간 명문. 명문이 들어간 당간은 용두사지 철당간 말고는 아무데도 없다.
그 지리지는 모든 일을 잘 내다보는 옛날 술인(術人)의 말이라면서, 청주의 지세를 가리켜 떠나가는 배 형국이라고도 했다. 배는 돛대를 달아야 제격이기 때문에 누가 머리를 써서 지세 형국과 이치가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부러 꾸며냈을 것이다. 읍성(邑城)자취가 아직은 창연한 풍운의 시대를 살았던 창암(瘡菴) 박노중(朴魯重)은 19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청주의 풍정을 아름다운 시어로 노래했다. 그의 시에는 용두사자리 철당간을 가리키는 ꡐ동장ꡑ이 여러 번 시제로 나온다.

말은 교남 만리 구름에서 오고
학은 화묘 삼경달로 돌아가네
천고에 구리돛대 장관이요
낭성의 지세 배가는 것 같다하지

 그 높이가 18m에 이르렀다는 철당간은 고층 건조물이 흔치 않던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간 끄트머리에는 용머리 따위의 장식물을 올렸다. 그 당간 꼭대기에 달아맨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면, 사람들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고을이 몽땅 떠밀려가고 세속의 먼지와 그릇된 마음까지 날려 버린다는 착각, 그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경지였다. 거기다 청주 사람들은 철당간이 거선(巨船) 청주호(淸州號)의 마스트이자 심벌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지우지 못하고 있다.

본래 절집에서 법회나 기도 따위의 의식을 베풀 때 당(幢)이라 일컫는 깃발을 올리려고 지은 장엄한 불구가 당간이다. 거기에 한 수를 더 곁들여 용두사 종이 울면, 불자들 가슴은 마냥 설레였을 터다. 용두사 절에는 생김새가 이상야릇하고, 소리가 몇 리 밖까지 울려퍼지는 종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청주 사람이 땅 속에서 얻었다는 용두사 금구가 바로 그 범종일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당간을 지었던 흔적은 전국적으로 65군데나 분포한다. 그러나 거의가 당간을 지탱해 주었던 버팀기둥 당간지주(幢竿支柱)정도가 겨우 남았다. 다만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七長寺)와 충남 공주 갑사(甲寺)에는 고려시대 철당간이 남았지만, 지은 내력을 밝히는 당간기는 들어있지 않다. 안성 칠장사 철당간도 절의 지세가 떠가는 배 주행형(舟行形)이어서 돛대를 상징하는 철당간을 세웠다고 한다. 그 사연이 청주 용두사 철당간과 비슷하다. 안성 칠장사와 청주 용두사를 싸잡아 들여다 보면, 흥미로운 데가 있다. 칠장사 2대 주지였던 정현(鼎賢)의 법맥에서는 용두사에 철당간을 지어 세운 청주김씨 일가의 불심이 보이기 때문이다.

정현은 고려 승과(僧科)에 최초로 급제한 승려다. 속리산을 중심으로 한 신라 고승 진표(眞表)의 법상종(法相宗)을 이어받은 그의 법통은 영념(靈念), 순진(順眞), 덕겸(德謙)에게로 계승되었다. 그들 세 승려는 모두 청주김씨이고, 아재와 조카 사이다. 그런 인연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청주 용두사는 법상종의 절이었을 것이다.

   
▲ 오늘날의 용두사지 철당간의 모슴. 애초는 30단 18m의 높이었으나, 10단이 없어져 키가 13m로 줄었다.
어떻든 용두사지철당간은 당간기가 들어간 단 하나의 고려시대 유물이다. 그 철당간에서 주목할 부분은 새김글씨다. 옹골진 글씨인 데, 필획(筆劃)이 단정하다. 그것도 돋을글씨로 양주(陽鑄)한 것이고 보면, 새김질을 하고 쇳물을 다룬 공장(工匠)들의 솜씨가 신기(神技)에 가깝다고 찬탄할 수 밖에 없다. 당간기 글씨를 만약 외로 양주했다면, 곧바로 금속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금속불구(金屬佛具)를 만들었던 청주지역 전통의 중세 금속공예술은 면면히 이어졌다. 그것은 금속활자를 양주한 기술의 밑바탕이 되었고, 마침내 세계 최고(最古)의 흥덕사본(興德寺本) 금속활자책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같은 인쇄문화로 거듭 태어났다.

우리가 역사를 먼저 알고 철당간 앞에 다시 서면, 전혀 다른 자태로 다가 온다. 정법(正法)을 지킨다는 범천왕(梵天王)의 세계를 상징한 당간 꼭대기에서 당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리고 하늘이 맑은 가을날 만국기가 춤을 추었던 초등학교 운동회날의 가슴 설레임같은 감회를 느낄 것이다.         <황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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