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인 선사시대에는 종족간의 유전자 교환이 많았는데 이를 국제결혼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리송하다. 심정적으로는 국제결혼이나 국가나 국경 개념이 없던 때임으로 국제결혼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배달겨레는 모두 단군 할아버지의 단일 자손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상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만주 및 한반도, 일본열도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한(韓)민족의 생성은 대략 2만5천년 전쯤에 그 유전자가 형성된 것 같다.

중국대륙의 동북삼성, 즉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에서 몽골 족과 한족, 그리고 우랄 산맥을 넘어온 여러 종족들이 유전자 교환을 거친 후 그 일단의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숙성하며 배달겨레를 탄생시킨 게 아닌가 관련학계는 보고 있다.

우리와 매한가지로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 등에서는 공통적으로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는 몽골반점이 보이나 얼굴체형, 치아의 모양은 또 다르다. 한(韓)민족의 이빨은 넓적한 부삽이빨이나 인디언의 이빨은 날카로운 송곳이빨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국제결혼을 시도한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는 동방원정에서 페르시아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종군 병사 2 만 명도 현지에서 국제결혼을 하였다. 이 대규모의 국제결혼은 헬레니즘을 활짝 꽃피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국제결혼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과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후(許皇后)의 결혼에서 처음 찾아보게 된다. 허황후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 남해안에 이르렀는데 붉은 깃발을 꽂고 들어온 바닷가가 기출변(旗出邊)이고 가야국으로 상륙한 곳이 주포촌(主浦村)이다.

허황후가 가지고 왔다는 가야차(伽倻茶)는 죽로차(竹露茶)이며 파사석탑은 인도학자가 확인한 결과 인도산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김수로왕릉의 물고기 문장은 인도 아유타 문장과 비슷하며 초선대에 새긴 가야국 2대왕 거등왕 초상은 인도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출토된 드라비다족의 인물상과 흡사하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조선조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朴淵)이라 이름짓고 조선여인과 결혼하였다. 제주도 근처에서 표류한 하멜 일행은 조선에 억류되어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살다 일본으로 도망쳤다. 귀국 후 집필한 책이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이다.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파란 눈의 오스트리아 여인이다. 알프스 산록 호숫가에서 사랑을 싹 틔우다 결혼하여 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것이다.

혼혈아가 많이 태어난 것은 6.25후다. 미군과 한국여인 사이에 수많은 혼혈아가 탄생하였다. 일부는 미국으로 아버지를 따라 갔으나 상당수의 혼혈아는 이 땅에 남아 남모를 설움의 세월을 보냈다. 우리도 이국 땅에 씨를 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월남전 당시 한국군인과 베트남 여인 사이에 태어난 이른바 ‘라이 따이한’은 현지의 냉대 속에 핏줄을 찾고 있다.

농촌총각 등 어려운 처지나 혼기를 놓친 노총각들이 국내 결혼이 어려워지자 베트남, 필립핀, 캄보디아 등지의 동남아 여인과 국제결혼을 하는 예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전에는 신부감으로 중국 내 조선족이 주류를 이뤘는데 이제는 동남아로 시선이 쏠리고 있다. 알콩달콩하게 신접살림을 탈 없이 잘 차린다면 국제결혼이 무슨 대수인가. 남녀간의 결합도 소위 국제화 기류를 타고 있는 것이다.   / 언론인·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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