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신륵사, <사명대사행일본지도>발견, 사료적 가치 높아

지난달 23일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는 명백한 일본 땅”이란 망언을 자행했다. 이에 서울시의회는 25일 성명서를 통해 “독도망언을 자행한 주한 일본대사를 본국으로 강제 추방하라”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시마네현 의회는 지난달 22일을‘다케시마의 날’로 제정한 바 있어 독도와 관련한 일본의 움직임은 나날이 수위를 더 하고 있다.
여기에 일제가 대한민국의 산자수려한 강산의 이름을 멋대로 바꾼 ‘창지개명(創地改名)’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돼는 등 최근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사회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4일 제천시 덕산면 신륵사에서는 단청과 벽화에 대한 국내 최초의 연구결과가 1차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그중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강화를 위해 일본방문시를 묘사한 벽화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23>등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 벽화는 사명대사와 일본, 제천이 연관되면서 그 역사적 배경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있어 본지는 상세히 조명해 본다.
단청과 벽화에 대한 연구ㆍ보존만을 위한 학술조사로는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이번 ‘신륵사 극락전의 단청 및 벽화연구조사’는 문화재 관리와 보존에 대한 발전적인 사례로서 타 지역의 문화재보존에 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24일 충청대학박물관(관장 장준식)은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신륵사 현장에서 제천시(시장 엄태영)의 의뢰를 받아 착수한‘제천신륵사 극락전 단청 및 벽화 조사연구’의 1차 결과발표하며 “신륵사 극락전(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32호) 내ㆍ외벽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었던 사명대사가 강화 정사로 일본 방문시를 표현한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26>(泗溟大師行日本之圖)와 <위왕조조도 designtimesp=20827>(魏王曹操圖) 등의 벽화 136폭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140매의 단청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극락전 외벽 우측상단에 그려진 벽화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29>는 사명대사의 일본 방문을 묘사한 벽화로는 국내 최초 발견이다. 지금까지 사명대사의 일본행을 묘사한 그림은 두 점뿐.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의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 designtimesp=20830>(四溟大師 日本上陸行列圖八曲屛; 유형문화재 제274호)은 8폭의 병풍 형태이나 벽화로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32>는 임진왜란 당시 강화 정사로 일본에 상륙한 대사 일행을 일본인들이 수행하는 행렬을 묘사하고 있다. 벽화에는 100여명의 인물군이 등장하며 사명대사가 가마를 타고 있고 일본인들이 호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일본군이 무릎을 꿇고 있으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는 모습은 매우 독특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가늠케 하는 사료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34>의 우측 옆에는 중국의 위(魏)나라가 왜(倭)를 정복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남대방편)을 근거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위왕조조도 designtimesp=20835>가 나란히 있다. 이와 관련 책임조사원을 맡고 있는 권현규 장인(충북도 무형문화재 단청장 제9호)은 “당시 벽화를 그린 사람의 역사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사찰벽화 중 걸작 중의 걸작이며 왜 이런 유형의 벽화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라고 말했다.
연구와 보존만을 위한 학술조사로는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이번 연구조사는 문화재 관리와 보존에 대한 발전적인 사례로서 타 지역의 문화재보존에 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 관장은 “신륵사에는 사명대사 일행의 일본 방문을 묘사한 벽화뿐만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많은 벽화와 단청이 있어 훼손을 막기 위한 현황 모사 등의 보존대책이 절실하다. 국가유형문화재로의 격상도 논의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의 지도위원을 맡고 있는 정영호 교수(단국대박물관장 겸 석좌교수)는 신륵사에서 열린 지도위원회에서 “불화와 단청은 불교미술사이지만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38>는 일본군이 사명대사에게 항복하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 현실적으로 민족정기와 주체의식을 세우는데 다시없는 그림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이 벽화가 보존되어 온 것이 다행스럽다”라며 추가의 훼손을 막기 위한 보존대책이 수립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어 “이번 조사는 연구와 보존만을 위한 학술조사로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문화재 관리와 보존에 대한 발전적인 사례로서 타 지역의 문화재보존에 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 장인은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41>는 신겸 스님이 1805년을 전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내외부의 단청은 1800년대의 국내 단청이 잘 보존된 곳이 극히 드물지만 극락전 내부의 단청은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조선시대 후기 단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벽화 중‘일본군’무장해제 부분 주목
군사부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명대사는 1604년 8월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었으며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 3500여명을 인솔, 이듬해 4월에 귀국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벽화로 그려진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45>는 일본에게는 치욕적인 벽화이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47>는 사명대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굴욕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일본군이 포승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도열해 앉아 있으며 일본을 방문한 일행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본군의 병기를 도끼로 해체해 불태우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문화재위원들은 일본에게는 치욕적인 벽화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유지됐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나타냈다. 일제치하에서 이 벽화가 발견되었다면 조기에 소실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정 교수는 “일본군이 사명대사에게 항복하는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기막힌 그림이다. 현실적으로 다시없는 민족정기와 주체의식을 얘기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다. 신륵사의 벽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그려졌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개칠을 통해 부분적으로 변형되었으나 이 역시 개칠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그대로 담고 있기도 해 신륵사의 성격 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륵사 극락전의 단청과 벽화는 1805년 전ㆍ후에 시공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개ㆍ보채작업이 진행되었고 외벽에 걸려 있는 <신륵사중수기 designtimesp=20850>는‘1960년에 중수했다’라고 적고 있다. 권 장인은 “단청과 벽화를 개ㆍ보채한 경우 원형 복원이 전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처음 개채한 화원이 그 이전까지 보존되어오던 유적의 진가를 인정해서인지 원형을 유지하기위해 애쓴 흔적이 벽화의 곳곳에 남아있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52>에서 아쉬운 점은 개칠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이 반영되었는지 일본군의 표현 등이 임진왜란 당시의 복식(服飾)이 아닌 근대적인 복식을 갖추고 있다. 추가적인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비록 상당부분 원형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사명대사행일본지도 designtimesp=20853>는 당시 우리 민중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시한 면이 있다. 벽화의 정확한 조성시기와 개칠된 부분은 안료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역사ㆍ사료적 배경 등을 통해 작자를 규명하기 위한 추가적인 연구조사가 필요하다”라고 조사 의견을 밝혔다.
/ 정홍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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