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문화의 빛 모은 역사 곳간 <임병무>

청주의 진산(鎭山), 우암산에 외돌아 앉아 옆으로 들어 누운 소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국립 청주박물관은 청주를 비롯하여 중원의 역사 문화가 생생히 살아 숨쉬는 향토사의 버팀목이자 곳간이다.

지난 82년, 청주박물관이 착공할 당시 시내에서 너무 멀지 않느냐는 여론이 있었으나 도시가 확장되고 우암산 뒤쪽이 명암 약수터 및 상당산성과 연결되는 종합 휴식 레저 공간으로 자리잡아가면서 명암지를 굽어보고 있는 청주박물관은 청주문화의 로터리에 서 있는 듯 듬직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3.1공원에서 출발하여 우암산 우회도로를 한바퀴 돌면 명암지에서 올라오는 길과 삼각지를 형성하며 청주박물관에서 만나게 된다. 그 위쪽으로는 우암어린이 회관, 천문대, 청주동물원 등이 연이어져 명실공히 관광 문화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청주의 외곽에서 문화벨트의 선봉장으로 자리 매김 하는 데에는 무려 십 수년이란 연륜이 소요되었고 벽돌 하나 하나를 쌓아 올리기 까지 사연도 꽤 많이 얽혀 있다.

▲ 국립청주박물관 전경 국립 청주박물관을 말하자면 3만평의 건립 부지를 선뜻 내놓은 고 곽응종(郭應鍾)씨를 빼놓을 수 없다. 만약 그가 부지를 희사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청주박물관은 기대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고 곽응종씨는 명암 약수터 일대에 약 80정보의 임야를 소유한 부자임에도 세간에는 '구두쇠 영감'으로 소문나 있었다. 평생 넥타이 한번 매 본적 없고 구두를 신어본 적도 없다. 현재 명암 파크 호텔의 전신인 청주관광호텔을 약수터 부근에 지어 놓고도 막상 자신은 호텔에서 하루를 자 본적도 없다. 호텔 근처 움막집에서 살 정도로 근검절약을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 이때 청주 지역사회에서는 우리고장에 국립 박물관을 짓자는 여론이 비등했다. 청주를 가리켜 천년고도니, 학문의 고장이니 자화자찬을 하면서도 막상 청주의 역사문화를 한눈에 보여줄 번듯한 박물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주 지역일대에서 출토된 유물이 박물관이 없다는 이유로 공주 박물관 등지서 근 1천 점이나 타향살이를 하였다.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로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그러나 국립 박물관을 짓는다는 게 어디 한 두 푼 가지고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지역사회에서 안타까운 얘기만 무성할 때 고인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건립부지 3만평을 내놓기로 결심한 것. 당시 3만평의 부지는 시가로 30 억 원을 웃돌았고 지금으로 따지면 수백 억 원에 달한다. 이렇게 해서 건립부지는 일단 해결됐으나 국립 박물관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임의로 지을 성질이 아니다. 만약 충북도에서 자체적으로 지었다면 규모도 적었을 뿐더러 운영비 일체를 지방자치단체에서 부담해야 하는 취약점이 있다.당시 정종택 충북지사(현 충청대학장)는 이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중앙부처에 이를 관철시켜야 되지 않는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바 있는 정종택 지사는 비서관 시절 친분이 있는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에게 SOS를 타전했다. 김 장관이 이 부탁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니까 박 대통령은 단호히 거절했다. "20만 도시에 무슨 국립 박물관이야" 박 대통령에게 툇자를 맞고 나니 난감한 일이었다.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마침 박 대통령이 충북을 초도 순시하였다. 정 지사는 이때다 싶어 수안보 등지로 박 대통령을 동승, 안내하는 자리에서 충북의 유적 유물현황과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간청했다.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내 지난 82년 국립 청주박물관의 첫 삽을 뜨게 된 것이다.설계는 당시 이 분야에 있어 일인자였던 고 김수근씨가 맡았다. 김수근씨는 한국의 전통 한옥을 형상화하여 국립 청주박물관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암초는 또 있었다. 바로 건립 예산이었다. 박물관 건립 예산은 툭 하면 끊기었다. 이 통에 첫 삽질에서 완공까지 무려 7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토목공사에 있어 공사기간이 빠르기로 이름난 우리 나라의 현실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늑장 공사였다. 그러나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다. 그 늑장 공사가 박물관을 튼튼하게 지은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산이 찔금 찔금 나올 때마다 조금씩 공사를 하였는데 그 굼뜬 기간이 시멘트를 매우 단단히 굳게 했다. 전국적으로 봐도 국립 청주박물관은 손색이 없다. 더욱이 명암 약수터로 가는 길목에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이곳에서 밖을 보면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 풍광에 넋을 잃는다. 이곳을 거쳐간 여러 명의 박물관장은 거의가 이임을 할 때 그 풍광을 아쉬워한다. 박물관 건립에 밀알이 되었던 곽응종씨는 준공 7개월을 앞두고 87년, 세상을 떴다. 그의 기념비가 박물관 귀퉁이에 있었는데 너무 초라하여 지역사회의 뜻 있는 인사들과 청주박물관 측이 정성을 모아 박물관 어귀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2001년 11월 8일에 해 세웠다.공적비는 높이 1m 20cm, 너비 2m로 충남 보령산 오석이다. 전면에는 '곽응종 선생 공적비'라고 쓰고 뒷면에는 시인 홍석원씨가 비문을 짓고 김동연씨의 글씨로 새겼다. 비문 내용은 이렇다. ▲ 곽응종 선생 공적비
"1978년 충청북도에서 찬란한 중원문화의 빛을 모아 역사 곳간을 짓고자 할 때 부지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중 명암 약수터에 살던 곽응종 선생이 3만평의 토지를 흔쾌히 내놓아 87년 이곳에 국립청주박물관을 탄생시켰다. 80평생 근검절약하며 한푼 두푼 피와 땀으로 이룩한 재산을 공익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선생의 공덕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01년 11월 청주시, 국립청주박물관, 충북지역개발회(건립추진위원: 우영 충북지역개발회부회장, 김동기 청주시부시장, 고수길 국립청주박물관장, 김동연 청주예총회장, 장현석 충북도문화재위원, 박영수 청주문화원장)

옛 말에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일컫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인의 숭고한 뜻은 길이 길이 남을 것이다. 4개의 상설전시장과 더불어 기획전시실, 어린이 전시관, 영상물 전시실 등을 갖춘 청주박물관은 글자 그대로 청주, 중원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담은 향토사의 보고(寶庫)이다.

상설전시장에는 선사시대에서부터 삼한, 삼국,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충북의 특성을 담은 2천3백여 점의 유물이 입체적으로 전시되고 있다.    

남한강, 금강이 소백의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며 탄생시킨 충북의 선사문화는 단양 금굴, 수양개, 청원 두루봉, 제천 창내 유적 등이 말해주듯 선사유적의 높은 밀집도를 보이고 있으며 유적마다 충북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중고 역사교과서에서도 언급됐듯 단양 금굴은 70만년전,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시원지이며 수양개는 우리나라 후기구석기(2만년)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일본 큐슈지방으로 구석기 문화를 전파한 선사문화의 축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청주박물관에 가보면 현장을 보는 듯 유적의 모형과 유물 진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 박물관 전시실 내부 신석기 유물은 청원 쌍청리, 충주 조동리 출토 토기가 말해주듯 서울 암사동 식의 '가는 빗살무늬토기'와 부산 동삼동 식의 '굵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존재한다. 이를테면 한강문화권에서 낙동강 문화권으로 이행되는 문화의 전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시대이전에 벌써 충북은, 충북적인 중원문화를 숙성시키고 또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한반도 문화의 고리'역할을 했던 것이다. ▲ 국립청주박물관 문화재사생대회
제 2전시실로 접어들면 충북의 원삼국(原三國) 문화가 소박하게 펼쳐진다. 원삼국이란 AD1~2세기로 삼국의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인데 생활용기로 보면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한다. 쉽게 말해서 진한, 변한, 마한 시대다.  청주지역은 마한에 속했다. 부모산일대와 송절동, 신봉동 이른 백제고분 등지에서는 마한의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송절동에서 원삼국 시대의 토광묘와 토기 등이 발굴 조사된 바 있다.

청원 송대리, 진천 송두리, 진천 산수리 가마터 등도 마한의 흔적들이다. 마한의 문화는 AD를 전후하여 3백년 가량 존속하다가 이른 백제에 의해 정복당한다. 창,칼, 화살 등 강력한 철기집단이 금강상류인 미호천으로 진출하며 원삼국 문화는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른 백제시대의 대표적 고분인 신봉동 고분에서는 원삼국과 이른 백제시대의 유물이 함께 출토된다. 산의 아랫쪽에서는 마한의 문화가 숨쉬고 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쇠갑옷, 환두대도(손잡이에 달린 둥근 고리가 달린 긴칼)등 철기집단의 족적이 나타난다. 이른 백제시대의 가장 큰 철기문화 족적은 진천 석장리 유적이다. 이곳은 당시 제철과정을 그대로 말해주는 제철 유적이다. 제철로(製鐵爐) 송풍관 쇠똥 단조박편 등 유적과 유물이 국립 청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바 있는데 박물관 측은 당시의 제철과정을 실험을 통해 재현한 바 있다.

고구려 문화의 흔적으로서는 중원고구려비의 모형을 비롯 귀고리, 납석제불보살병립상, 건흥5년명금동광배 등을 꼽을 수 있다. 충북은 삼국의 각축장이라 그런지 삼국의 유물이 모두 출토되는데 이중 고구려 계통의 유물은 적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세력판도를 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 계유명전씨 아미타삼존불비상 신라문화는 지배기간이 가장 길기 때문에 이 지역서 삼국의 문화 중 가장 빈도수가 많고 규모도 크다. 보은 삼년산성 근처인 성주리 출토 말갖춤새(마구장식), 청원 미천리 출토 토기와 귀고리, 단양 하리에서 나온 동관(銅冠), 충주 누암리 출토 허리장식, 단양 적성비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제3전시실에서는 충북의 통일신라와 고려문화를 보여준다.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문서에는 8~9세기경 서원경의 생활상이 기록되어 있다. 인구, 가구수, 토지, 과일나무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운천동사적비는 불법을 찬양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내용이 담겼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상당산성에서 찾아진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명문 기와는 당시 서원경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 청주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비슷한 체제아래 도시를 형성했던 것이다. 사량부는 초기 신라 6부중의 하나다. ▲ 운천동사지 출토 청동범종
충남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의 비암사에서 출토된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불비상(癸酉酩全氏阿彌陀三尊佛碑像:국보 제106호)은 "내말(乃末), 대사(大舍) 등 신라 관등(官等)과 함께 전씨(全氏), 진씨(眞氏), 달솔(達率) 등 백제 성씨와 관등을 가진 사람들이 아미타불과 관음, 서지보살을 함께 만들었다" 라는 글귀가 있다.(국립청주박물관도록)

여기에서는 백제의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통일신라에 편입되는 과정을 엿 볼 수 있다. 흔히 천불비상(千佛碑像)으로 불리는데 불비상(佛碑像)이란 비석모양으로 돌을 다듬은 다음 4면에 부처를 조각하고 발원문을 새겨 놓은 형태다. 이 불비상에는 천불(千佛)을 헤아릴 정도로 부처님 조각이 가득하다. 이런 형태는 비암사, 연화사, 서광암 등 주로 연기군에서만 발견되는데 이는 연기가 백제의 옛 땅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지역 통일신라 문화는 운천동 출토 범종(보물 제1167호)을 비롯 제천 송계리 출토 금동여래좌상, 청주 농촌동(현 강서동) 출토 금동여래입상 등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려의 생활문화는 명암동 고려무덤 출토유물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무덤에서는 '원앙연꽃무늬장신구', '동전' 등이 나왔는데 관심을 끄는 대목은 단연 고려먹 '단산오옥(丹山烏玉)'이다. '단산'은 '단양'을 가리키는 말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산오옥'을 최상품으로 치고 있다. 이 단양 먹의 발견은 청주가 예로부터 학향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 된다.

▲ 금강령(청주 사뇌사) 고려문화의 백미는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낸 흥덕사지(청주시 운천동)출토품에 있다. 서원부 흥덕사(西原府 興德寺) 명문이 새겨진 금구(禁口:공양시간 등을 알릴 때 치던 쇠북으로 금고, 반자 등으로도 불림)와 흥덕사 명문이 있는 불발, 와당(도깨비 무늬, 연꽃무늬 등)이 전시돼 있다.또 흥덕사지 양쪽 끝부분에서 나온 치미 (지붕의 용마루 양 끝을 장식하는 기와로 새의 깃털 형태를 띠고 있다)는 높이가 1m 36cm나 되는데 이는 황룡사 치미 1m 86cm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두 번째 크기의 치미다. 이 복제품들은 청주고인쇄박물관에도 전시하고 있는데 왜 출토지인 현장에 진품을 진열치 않고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의문이 갈 것이다. 땅속에서 나온 문화재를 '매장문화재'라고 하는데 이 것이 출토될 경우 보관, 전시를 할 수 있는 이른바 '매장문화재 위탁기관'이 별도로 지정돼 있다. ▲ 망새(청주흥덕사)
국립청주박물관은 1순위로 매장 문화재를 보관할 수 있다. 불행히도 청주고인쇄박물관은 국립이 아닌, 청주시 사업소 형태인데다 진품을 진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때문에 부득이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매장문화재 위탁기관이 되려면 보안장치는 물론이고 통풍, 채광, 습도 등이 적정수준을 유지하여 유물보관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

청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유물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뇌사(思惱寺)출토 불구(佛具)다. 이곳의 철제품은 1993년 용화사 앞 무심천 제방에서 전주 이설공사를 하다가 발견되었다. 청동범종, 청동 기름말, 향로, 금구, 금강령, 금강저, 청동향로, 쇠자물통 등 불구 다수가 출토되었는데 이중 금구에는 '사뇌사'라는 명문이 뚜렷하며 기타 철제품도 고려시대 철제품 제작의 발달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제4전시실에는 투각 기법으로 만든 진천 용몽리 출토 '용무늬 의자'를 비롯 백자, 분청사기, 청화백자가 즐비하다. 고려의 청자에 이어 탄생한 분청사기와 조선백자 등 자기류는 선인들의 넉넉한 마음과 멋스러움을 쉽사리 짐작케 한다.

제천 시곡리에서 나온 금동약사보살상, 음성 감우리 출토 신상(神像), 월악산 출토 토제소탑 등은 불교문화의 편린이며 우암 송시열 서첩, 코끼리 모양 제기 등은 유교문화가 지배했던 조선사회의 흔적들이다. 상평통보와 돌 도장 등은 생활문화의 일단이며 보은 사내리에서 나온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은 임진왜란의 아픔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 별관

오늘날 박물관의 개념은 단순히 지나간 유물을 화석처럼 전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교육과 더불어 종합 휴식공간, 위락공간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현대미술전이나 어린이 문화재 그리기 대회도 열리고 이따끔 음악회도 열린다. 나들이 길에 유물과 예술의 어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오늘날의 박물관이다. 국립청주박물관은 그러한 사회교육의 축에 서 있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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