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가을 국무회의에서는 고속도로변에 세운 작은 팻말 하나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 희한한 일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얼마 전 경부고속도로변에 새로 만들어 세운 ‘노견주행금지’라는 낯선 표지판이었습니다.

노견주행금지라니, 승용차나 버스 승객들은 노견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글 깨나 아는 식자들 중에는 길에 있는 개(路犬)는 고속도로에 다니면 안 된다는 경고라는 등 웃지 못할 해석을 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일 뒤 표지판은 ‘길어깨주행금지’라고 바뀌었습니다. 여론이 분분하자 노견을 길어깨로 바꾼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노견소동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습니다.여론이 끓자 급기야 정부가 나섰고 노견시비는 국무회의에까지 올라가는 해프닝을 연출한 것입니다.

국정현안이 산적한데 한가로이 도로표지판 하나를 놓고 왈가왈부 논쟁을 벌이는 모습은 바로 해외토픽 감이었습니다. 결국 국무회의는 논의 끝에 ‘노견’을 ‘갓길’로 하기로 의결합니다. 곧바로 국무총리가 한글날 행사에 직접 나서서”노견을 갓길로 의결했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서 노견 시비는 일단락 됐습니다. “차량은 갓길로 통행하지 못 한다”는 도로교통법 개정이 뒤따랐습니다.

노견이란 단어는 영어의 ‘Road Shoulder’를 일본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직역해 로까따(路肩)라고 한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 나라가 다시 들여다 한자음대로 노견이라고 쓴데서 소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이없는 것은 노견이 말썽이 되자 이번에는 한자를 그대로 직역해 ‘길어깨’라고 고쳐 놓은 일입니다. 난센스의 극치였습니다.

노견주행금지의 본 뜻은 ‘갓길로 다니지 말라’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리면 얌체 운전자들이 먼저 가려고 갓길로 다니는 일이 흔해 이를 경고하기 위해 표지판을 세운 것이 국무회의에까지 상정되는 소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우리 공직 사회, 공무원들의 경직된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도대체 노견이라니 그걸 아는 사람이 표지판을 세운 그 사람 말고 몇 명이나 더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몇 일전 차를 몰고 무심천 제방도로를 따라 까치내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흐르면서 내에서는 이미 봄 내음이 짙게 풍겼습니다. 그런데 길가에는 ‘노견없음’이란 팻말이 꽂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팻말은 디자인도 단순했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군데 세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십 수년전의 고속도로 ‘노견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왕복 2차선의 좁은 차도에 표지판을 세운 의도는 좋았습니다. 갓길이 없는데 자칫 충돌사고의 위험이 높은지라 친절히 표지판을 세운 배려는 당연한 일이지만 고마운 착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왕에 운전자들을 위한 배려였다면 쉽게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었는지, 아쉬움이 컸습니다. ‘갓길이 없으니 조심하십시오’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작은 일 같지만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정부의 구호가 된 행정혁신이란 큰 일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작아 보이는 일을 그때그때 고쳐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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