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우리에 일장기를 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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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에 일장기를 내리자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5.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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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천황봉 ‘天王’에서 ‘天皇’으로 둔갑
광복 60주년 맞아 제이름 찾기 나서야

속리산 천황봉 등 ‘천황’(天皇)이라는 지명을 가진 봉우리들이 일제강점기에 이름이 바뀐 것으로 확인되면서 각계각층에서 옛 지명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추진되고 있지만 특별법 제정이 검토단계에서 무산되는 등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광복 60주년을 맞는 해로,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다 적극적인 개명 노력으로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속리산 주봉의 지명이 천황봉이 아니라 천왕봉(天王峯)이라는 주장은 2003년 12월 충북학연구소가 펴낸 ‘속리산’이라는 책자를 통해 처음으로 제기됐다. 이 책을 기획, 제작한 윤송현(45·신우기획 대표)씨가 대동여지도에 속리산 주봉이 천왕봉으로 표기된 것을 확인하고 정확한 지명에 대한 정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부터다. 윤씨는 이같은 내용과 관련해 보은군에 질의서를 보냈지만 ‘천황봉이라는 지명은 1961년 국무위원회의 고시에 따른 것으로 당시 충분한 검토를 거쳤을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데 그쳤다.

일제가 계획적으로 우리나라 산봉우리의 이름을 바꿨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후 일제시대에 발간된 지도에 대한 조사를 통해 윤곽이 드러난다. 일본 육군이 한국 침략에 이용할 목적으로 무려 12년 동안 비밀리에 측량과 지명조사를 거쳐 1911년에 발행한 ‘한국지형도’에는 속리산의 주봉이 천왕봉으로 명기된 반면, 1919년 조선총독부의 소유권 아래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지도에는 천황봉으로 표기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히 두 지도와 대동여지도, 해동지도 등을 비교한 결과 속리산 뿐만 아니라 밀양 재악산, 영암 월출산 구정봉, 완도 상왕봉 등 적어도 20여군데 산이나 봉우리의 이름이 천황(天皇)이나 왕(旺: 日+王)자가 들어간 지명으로 둔갑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명이 바뀐 산들은 대부분 전남과 경남, 강원도 등의 해안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처럼 1911과 1919년 사이에 지명이 바뀐 것이 확인됨에 따라 1914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산봉우리의 이름도 함께 바꿨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과 밀양, 이름 되찾기 빛과 어둠
해방 50주년인 1995년 일본 총독부로 사용됐던 중앙청의 첨탑을 제거하는 등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한 각종 사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바뀐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지명이 원래 이름을 되찾기도 했다. 각종 옛 지도와 강희안의 그림 ‘인왕산도’ 등에서 인왕산(仁王山)이라는 옛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서울의 진산 인왕산이 일제가 슬그머니 바꾼 왕(旺)를 떨어내고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서울시는 이와 함께 원효로에 있는 한강 지류 욱천(旭川)도 옛 이름인 만초천으로 되돌려 놨다. ‘아침해 욱’(旭)자 역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한자로 일본 곳곳에 욱천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유·무형으로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운동은 총독부 건물을 헐고 1996년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상징인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것으로 집약된다. 또 1980년대부터 시작된 산악의 쇠말뚝 뽑기 운동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지명을 개명하는 과정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곳도 있다. 천황산이 있는 밀양시의 경우 천왕산으로 개명을 추진했지만 이 산을 경계로 둔 인근 자치단체의 동의를 얻지 못해 옛이름을 찾지 못한 것이다.

지명변경은 측량법 제58조에 따라 시군구지명위원회와 시도지명위원회를 거쳐 지명변경의 사유를 제시하면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이를 검토, 변경하게 되는데 자치단체 간 경계가 되는 경우에는 인근 자치단체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영민의원 특별법 추진하다 중단
이처럼 일제에 의한 악의적 지명개편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정부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옛 지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 노영민(청주 흥덕갑)의원이 2004년 7월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법제처의 검토 결과 ‘너무 광의적’이라는 회신을 받고 이를 중단한 상태다.

노영민의원실 이상식 비서관은 이에 대해 “문제의 소지가 있는 ‘皇 ’자나 ‘旺’자 등 특정 한자가 들어간 산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너무 광의적인데다, 산이름이 아닌 봉우리 이름까지 데이터화 되어있지 않아 개명 대상을 추려내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현실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일제 잔재가 남아있는 옛 지명은 한시적 특별법 등을 통해 일괄적으로 개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지명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것은 행정상 용어와 지도 등을 모두 바꿔야 하는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에서 단번에 이뤄질수록 행정적, 재정적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를 측량법 상 지명위원회에 의한 지명개편에 의존할 경우 해당 자치단체의 의지가 없을 경우 아예 추진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다, 인근 자치단체와의 이해 조정 등으로 개명 추진이 장기화되거나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산이름 되찾기에 나선 산림청
특별법 제정이 검토단계에서 무산된 가운데 산림청을 비롯해 환경단체인 녹색연합 등이 옛 이름을 되찾는 일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산림청은 숲의 날인 2004년 10월18일 일제시대에 의해 왜곡된 우리 산이름을 되찾기 위해 ‘우리 산이름 바로찾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산림청은 이후 자료수집 활동에 나서 현재까지 36건을 접수했으며 이달 말까지 자료수집을 마친 뒤 4월부터 전문가집단의 검토를 거쳐 오는 7월 자치단체에 권고 형태로 지명 개편을 요청할 계획이다. 특별법 등을 통한 정부 차원의 일괄 개정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시기적 통일성을 꾀하기 위한 차선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산림청이 수집한 사례에는 ‘皇’이나 ‘旺’ 등이 들어간 산이름은 제외돼 있는데 이는 건교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에도 봉우리 수준의 지명이 데이터화 돼있지 않아 그 광범위한 실태를 파악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산림청 산림휴양정책과 최영태사무관은 “자치단체에 수집사례와 함께 ‘皇’자 등 특정 한자가 들어가 있는 산이름을 예로 들어 개명을 권고할 계획이며, 추가 조사와 개명 여부 결정은 자치단체의 몫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녹색연합 백두대간보존팀도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 산의 지명을 조사해 이를 쟁점화한다는 방침아래 전국을 답사하고 있으며, 이달 초 보은군청을 방문했다가 천황봉 사례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녹색연합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얼음 폭포로는 아시아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설악산의 토왕성폭포도 ‘王’에서 ‘旺’으로 지명이 개정된 사례로 지목돼 일제의 지명 왜곡이 얼마나 치밀한 수준이었는지를 짐작케 하고 있다.

보은군은 ‘근거 없어 모르겠다’ 일관
보은군은 속리산 천황봉의 지명 개명과 관련해 지난해 봄 윤씨의 질의서가 한차례 접수됐을 뿐 그 전후에는 어떤 문제제기도 없었다며, 정확한 근거가 없어 뭐라고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보은군은 또 산림청에서 일제에 의해 훼손된 산이름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보은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산림청으로부터 산이름 개명에 관한 권고 협조문이 오면 그 때가서 검토해 보겠다”며 아직까지는 이 문제가 전혀 관심사가 되고 있지 않음을 내비쳤다. 보은군은 지난해 윤씨의 질의서에 대한 회신에서도 ‘천황봉으로의 변경이 고종황제의 즉위에 따른 것인지 일제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고, 1961년 정부의 고시에 따른 것임으로 충분히 검토됐을 것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부터 6.25 동란 이후 1958년 4월 국방부 산하 지리연구소가 생기기 전까지 측량과 지도제작 업무가 사실상 실종됐으며, 1961년 지명에 대한 정부의 고시도 시군의 보고를 기준으로 작성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60주년 광복절 앞두고 3.1절부터 시작하자
특히 올해는 광복 60주년을 맞는 해로 일제의 잔재를 떨어내기 위한 백방의 노력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바로잡아야 할 대상지명과 바꿀 지명에 대한 선정원칙을 정확히 정하고 추진기간을 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건교부 공무원 출신으로 현재 한국토지공사 지명위원으로 활동중인 김기빈(58)씨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발간한 ‘일제에 빼앗긴 땅이름을 찾아서’(살림터 간) 서문에서 “10년의 사업기간을 정해 이를 추진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또 대상지명과 관련해서는 원형이 훼손되거나 잘못 바뀐 지명, 중복되는 경우로 한정할 것을 제한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충북지역의 경우에도 여러 지명을 더해서 만든 이른바 합성지명이 상당수에 이르지만 이는 우리 조상들도 해온 방식으로 합성지명까지 대상에 포함시킬 경우 그 폭이 너무 광범위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한시대에 태자가 순행했다는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台城里)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의미가 축소됐다는 점에서 태성리(太城里)로 돌려놓는 등 훼손된 일부 지명은 개명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문화사랑모임 강태재대표는 이에 대해 “2005년이 ‘한일 우정의 해’라고는 하지만 독도 영유권 주장과 전범의 위패가 있는 신사에 대한 참배 시비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제가 자행한 문화말살정책의 잔재를 떨어내는 것은 시급한 일로 본다”고 말했다. 강태재대표는 특히 “일제의 개입 여부를 떠나더라도 어감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지명은 과감히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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