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돌다리 <임병무>

 강(江)과 내(川)가 있으면 반드시 다리가 있다. 다리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주고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얽혀 있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리의 연기가 돋보이는 '워털루 브리지'(우리 나라에선 '애수'라는 제목으로 상영됨)라든지, 전쟁의 포화로 얼룩진 '콰이 강의 다리' 등 이루 그 숫자와 사연을 헤아리기 어렵다.

청주사람들의 아련한 기억 속엔 늘 남석교(南石橋)가 마음의 한 귀퉁이에서 추억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무심천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이 냇물을 가로지르는 남석교를 빼놓을 수 없다. 남석교는 우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는 점이 애향심을 자극한다. 이 다리는 청주시 석교동 126의 44번지 일대, 쉽게 말해서 육거리 재래시장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지하에 묻혀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 남석교의 옛모습 1923년, 일인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는 '청주 연혁지'에서 남석교가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원년(五鳳元年)에 건립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연대는 신라 박혁거세 즉위 원년인 BC 57년에 해당한다. 또한 1894년, 충남 청양의 조충현(趙忠顯)은 하주당시고(荷珠堂詩稿)에서 '오봉원년' 이라는 기명(記銘)이 팔분 예서체(隸書體)로 새겨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돌다리 네 귀퉁이에 조성돼 있던 고려견(高麗犬)상 이라든지, 전체적인 조형기법으로 보아 '박혁거세 즉위원년' 에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돌 다리를 이 때 건립하고 고려견상을 후대에 배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남석교가 왜 육거리 재래시장 일대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무심천의 물길 변화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구한말, 청주읍성이 존재할 당시 무심천은 지금보다 훨씬 시내 안쪽으로 흘렀다. 그러다가 계묘년(1723) 홍수 등 여러차례 물난리를 겪으면서 무심천변에 들어섰던 석교동 일대의 시장이 쑥대밭이 됐고 청주읍성의 자연 해자(垓字:적군의 침입을 막던 성 둘레의 연못)역할을 했던 무심천의 물길은 남석교 밖으로 이동을 했다. 무심천 제방을 밖으로 내다 쌓은 후, 물이 흐르지 않는 남석교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던 것이다. 그후 남석교는 방치되고 점차 흙속에 묻히다가 1932년에 이르러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남석교에 관한 빛바랜 사진은 현재까지 3장이 전해지는데 이 사진과 1975년의 발굴조사, 그리고 노인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34~35칸에다 길이는 64m, 너비는 4m에 이른다. 다리의 제원이 기록물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이 치수가 정확하다. 돌다리의 길이로만 따진다면 서울 성동구, 한양대 앞의 '살곶이 다리' 가 70m로 제일 길고 남석교가 그 다음이다.남석교는 화강암을 이층으로 깔아 만든 돌다리이다. 마치 대청마루를 놓듯 돌의 널판지를 장방형으로 다듬어 양편을 이었다. 무심천 제방에다 교안(橋岸)을 석축으로 쌓고 대석(臺石)위에 돌기둥을 세운 다음 청판돌을 세줄로 깔았다. 세로 방향으로는 청판돌을 세줄로 깔고 그 사이 사이의 가로 방향으로 다시 돌을 짜맞춘 형태다. 다리기둥은 강자갈을 다져넣은 적심석(積心石)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사진상으로 보면 교각이 T자형, 또는 H자를 옆으로 뉘어놓은 듯 하다. 수심이 깊은 중간 부분의 다리 아랫부분은 상판(床板)처럼 판석으로 처리한 듯 하다. 화강암은 월오동 동막골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문헌에도 남석교에 관한 기사는 여러 번 등장한다.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등에 이를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눈 여겨 볼 대목은 홍수 등으로 여러 번 개축한 사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충청도읍지엔 '안정탁(安廷鐸:정조 18년 청주목사)은 남인으로 을묘년에 구휼을 베풀고 남석교를 다시 세웠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낭성지에서는 '목사(牧使) 최상정(崔尙鼎:경종 3년)이 계묘년의 물난리로 3칸이 떠내려간 남석교를 다시 옛 모습대로 세웠다' 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정진교(情盡橋) 등으로도 불린 남석교는 이렇듯 역사의 풍랑을 몸으로 부대끼며 향토사를 말해주는 무심천의 증인이다."사람의 일이란 끝없는 우주 사이에서/ 남으로 오고 북으로 가니 어느 때나 한가할까/ 이 다리 정진(情盡)이라 이름함이 마땅하지 않으니/ 돌아가는 구름을 따라 옛 산에 이르기 때문이라네"고려말의 문신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남석교의 그 유구한 역사성을 알 수 있다."긴 무지개가 깊은 못에 한 가닥 시렁처럼 걸려 있고/ 교묘하게 쌓인 석재들은 천년 세월을 전하네/ 우두커니 서서 천천히 지나간 옛 날을 돌이켜 생각하니/ 영화롭던 읍성의 하늘이 눈에 비치네"1923년에 '청주연혁지' 를 간행한 오오꾸마 쇼지는 남석교를 이렇게 읊었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남석교는 존재했다는 얘기다. 지금도 연세가 많은 노인 분들은 이곳을 오간 추억의 조각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남석교에 관한 고문헌과 더불어 청주의 고지도를 보면 여러군데서 남석교가 묘사돼 있다.전남 구례의 운조루(雲鳥樓:중요민속자료 제8호)에서 발견된 청주읍성도를 보면 남석교의 모습이 선명하다. 청주우후(淸州虞侯:우후는 병마절도사 다음가는 벼슬) 유억(柳億)이 채색으로 작성한 이 지도에는 무심천 제방의 능수버들이 연두빛으로 늘어져 있고 남석교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엔 남석교 네 귀퉁이에 서 있던 돌기둥(石柱)위의 어떤 장식물이 보인다. 이 장식물이 바로 남석교의 법수(法首)인 고려견상(高麗犬像)이다.잡귀의 범접을 막고 장식물로서의 역할도 겸했던 고려견상은 남석교가 매몰되면서 한 쌍은 동공원에, 또 한쌍은 지사관사로 옮겼고 1951년 동공원에 있던 한 쌍은 비로사나불좌상과 함께 청주대 경내에 있는 용암사로, 다른 한 쌍중 1기는 충북대 교정으로 이산가족처럼 헤어졌는데 나머지 1기는 행방불명되어 아직껏 찾지 못하고 있다. ▲ 남석교 난간에 있던 고려견상. 현재 용암사에 한쌍이 있다.
용암사에 보관중인 한 쌍의 고려견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높이 2m 안팍의 팔각 기둥위에 아직도 방울을 단 고려견이 천년사직을 굽어보고 있다. 발톱도 조각되어 있으며 꼬리가 몸 전체를 살짝 감고 있다. 충북대 교정에 보관된 고려견상 1기는 머리부분이 없는, 반파된 상태다.  "내가 있던 자리가 어디냐" 고 고려견은 포효하나 남석교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한다.

남석교는 내(川)의 이쪽 저쪽을 이어주는 물리적 다리 역할이외에도 정신적 문화가 배어있는 곳이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다리 밟기'라는 민속행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이중 '남석교 답교놀이'는 '강릉 하평 답교놀이', '안양 만안 답교놀이', '수원 답교놀이' 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답교놀이 풍습은 대체로 비슷했다. 자기 나이 수대로 다리 위를 오간다. 스무 살이면 20번, 쉰 살이면 50번을 오가며 건각을 기원한다. 여기에다 영복송액(迎福送厄)이라는 주술적 의미도 보태어졌다.

▲ 청주대 학술조사팀이 복원 청사진으로 제시한 남석교복원조감도 그러나 다리 밟기는 단순히 악귀를 쫓고 복을 빈다는 주술적 의미만 띤 것이 아니다. 다리밞기를 통해서 다리의 힘을 길렀으니 오늘날로 치면 성인병 예방의 의미도 지닌 것이다. 다리 밟기는 대체로 고려 때 시작돼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엔 우리의 생각보다 남녀교제가 훨씬 자유로웠다. 따라서 다리 밟기는 남녀의 은밀한 데이트 코스와 기회를 제공했던 부수적 효과도 있었다.연인들의 속삭임이 수를 놓았고 보부상들의 발길이 뻔질났으며 동학농민운동때는 민초들이 피흘리며 이 다리를 건넜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다 땅속에 묻힌 남석교는 한차례 발굴조사 이후 복원의 타당성만 제기됐지 아직껏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최근에 육거리 재래시장에 아케이드 공사를 하던 중 네 군데에서 남석교 상판이 확인돼 공사가 중지되었다. ▲ 2002년 4월 육거리시장 아케이트 기초 공사중 모습을 드러낸 남석교 상판
길이 64m에 이르는 남석교를 현장에 복원하면 우선 옛 도시 청주의 역사성을 크게 살릴 수 있다는 점이 큰 수확이다. 이를 현장에 복원하여 대형 유리로 씌운 뒤 다리 밟기 등의 행사를 벌이면 역사 관광과 더불어 육거리 재래시장의 활로를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천년, 청주 역사의 영욕과 함께 숱한 인류의 족적이 묻어 있는 남석교는 이제 그 부활의 징후가 보인다. 부디 오랜 역사의 잠에서 깨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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