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산에는 아직도 백제가 있다. <황규호>

청주에는 지금도 백제가 있다. 무심천과 까치내가 만나는 합수머리 채 못미쳐 왼쪽에 자리한 월명산(月鳴山) 아래 명심산(明心山)이 거기다.『여지도서』에 나오는 봉림(鳳林)은 바로 그 일대 야산일 것이다. 달이 휘영청 밝은 소나무숲에서 봉황(鳳凰)이 날개를 펴 울음을 터뜨렸다는 전설이 깃들였다. 이웃한 신봉동(新鳳洞)과 봉명동(鳳鳴洞) 마을 이름에도 봉황새가 어른거린다. 그 신봉동 명심산 자락에다 백제인들은 일찍 무덤을 떼로 지었다. 그리고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잠이 든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그들 주검의 집 유택(幽宅)은 지난 1987년 사적 제319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죽어서 뒤늦게나마 매지권(買地卷)*을 얻었다고나 할까. 오늘의 현대국가가 신봉동 백제인들에게 모처럼 영면(永眠)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 청주 신봉동 무덤유적에서 주류를 이루는 움무덤. 모두 331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 움무덤은 자그마치 228기에 이른다. 그토록 청주에 많은 유택을 짓고 묻힌 다른 고대인들은 아무도 없다. 오직 백제인들 뿐이다. 백제의 무덤이 그만큼 많은 지역 또한 청주 말고는 어디에도 없다. 백제의 무덤떼는 해발 103m의 언덕배기 월명산 비탈을 온통 다 차지했다. 그 무덤유적은 지난 1982년 충북대 박물관을 주축으로 첫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후 3차례에 걸쳐 조사한 무덤과 그 안에서 나온 출토유물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백제다운 백제의 실체 몇가닥을 잇는 실마리가 되었다. 영토와 전쟁, 통치와 국가경영, 문화 모두를 아우른 사고(史庫) 그것이었다. 그래서 백제사를 다시 써야할 코투리와 함께 새롭고도 명쾌한 역사의 플롯을 찾았다.이제 "청주에 백제가 있다"는 말을 서슴치 않아도 좋다. 모두 331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도굴꾼이 먼저 온 산을 훑고 지나간 뒤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것을 거두었다. 그 때 움무덤(土壙墓)을 비롯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등 온갖 매장유구를 찾아냈다. 천년을 하고도 수 백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무덤은 그렇게 어울려 있었다. 움무덤이 가장 많았다.228기에 이르는 움무덤떼는 백제 최대의 움무덤 밀집지역이기도 했다. 그 무덤들은 명심한 아래쪽에서 윗쪽으로 차근차근 지어 올라갔다. 그래서 윗쪽 무덤들은 시기가 늦다고 하지만, 묻힌 이들의 신분은 더 높았다. 그들 윗쪽 무덤에 묻힌 이들의 신분이 높다는 생각은 껴묻거리(副葬品)로 묻은 유물을 잣대로 한 것이다. 주검을 넣은 널의 방향은 산등성 등고선(等高線)을 따라 길게 뉘었다.신봉동 무덤유적을 지은 시기를 똑불어지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덤을 지은 솜씨나 토기류 따위의 출토유물로 미루어 대체로 4세기 전반~5세기 중·후반을 걸치는 시기로 보고 있다. 무덤에서 나온 토기류는 입큰목항아리(壙口長頸壺) 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 토기들은 백제가 한강유역에다 얼마만큼 자리를 잡은 한성시대(漢城時代·서기250~475년) 움무덤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백제 한성시대에 가까이 다가선 유적의 하나가 신봉동 무덤떼였을 것이라는 어림잡은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 무렵 청주지역의 토박이 세력들은 이미 백제 그늘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그런 뚜렷한 조짐은 몇몇 출토유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청주 신봉동 무덤유적에서 나온 은박이고리자루칼. 가진이의 신분을 상징했기 때문에 위세품 구실을 한 이고리자루칼은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나중에 지은 신봉동유적 윗쪽 무덤에서 나온 세잎고리자루칼(三葉環頭大刀)*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값진 출토품은 백제 중앙의 세력과 지방세력 사이를 잇는 권력의 고리를 상징한다. 바다를 건너 중국 남조(南朝․서기  420~589년)에서 들어왔을 외래품 세잎고리자루칼은 백제 중심에 든 실력자가 지방 우두머리들에게 보낸 사여품(賜輿品) 같은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신분을 상징한 터라, 위신재(威信財)라고도 했다. 신봉동 유적에서는 고리자루칼이 모두 4자루나 출토되었다. 청주 신봉동에서 나온것으로 알려진 또 다른 은박이고리자루칼(銀象嵌環頭大刀)한 자루가 청주대박물관에 있다. 그저 신봉동 어디쯤에서 나왔다는 입소문이 따라다녀 '전(傳)·신봉동 출토(出土)'라고 쓴 머리말 설명이 붙은 유물이다.

고대 청주지역의 세력집단은 신봉동 무덤에다 숱한 쇠붙이를 묻어 두었다. 그 분량은 놀랍도록 엄청났다. 147기의 움무덤과 3기의 돌방무덤에서 1000점이 넘는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들어 낸 괭이같은 농기구도 보인다. 그러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쇠를 여러 차례 담금질하고 두들겨 만든 이른바 단조품(鍛造品) 무기류가 더 많다. 무기는 모두 7가지 262점에 이른다.

농기구는 끌 따위의 공구까지 합쳐도 6가지 242점에 지나지 않는다. 싸움아비 무사(武士)들이 전쟁터에서 말을 탈 때 말 몸뚱이에 달아주는 말갖춤(馬具) 등 또 다른 철기류도 510점이나 쏟아져 나왔다.

철제무기류에는 크고 작은 칼, 창날, 두겁창, 칼집, 화살촉이 있다. 말안장에 달렸던 쇠조각과 발걸이, 띠고리와 재갈 따위의 말갖춤도 200여점이나 된다. 또 갑옷과 투구를 일컫는 갑주(甲冑)는 전쟁용 무구(武具)연구의 중요자료로 떠올랐다. 말갖춤과 더불어 흔치 않은 유물이다. 갑주는 목갑옷(頸甲), 어깨갑옷(肩甲),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 만든 투구(縱細長板革綴冑)등으로 이루어 졌다.

철제유물은 신봉동 이웃 봉명동과 송절동, 까치내 건너 청원군 송대리 움무덤에서도 나왔다. 송대리에서는 고리자루칼 4자루와 함께 110여점의 철제무기류가 무덤 속을 나와 햇빛을 보았다. 그래서 청주를 중심으로 한 미호천유역의 백제문화권을 지도로 그려 여러 유적을 촘촘히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 청주 신봉동 무덤에서 나온 금귀걸이. 한성시대 금세공품의 전통을 그대로 드러낸 이 귀걸이는 가는 고리에 더 가는 고리를 차례로 잇고 드리개를 매달았다. 고리자루칼같은 외래품을 빼고는 모두 미호천유역에서 자급자족했을 것이다. 쇠를 뽑아내거나,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한 불가마자리 13기가 발굴되었던 진천 석장리(石帳里)제철유적*은 청주에서 그리멀지 않다. 그리고 토기를 구웠던 진천 삼용리(三龍里)와 산수리(山水里)가마유적도 같은 미호천 수계에 들어있다. 그들 고대 산업시설은 철기류와 토기류를 청주지역 바깥인 천안지역에까지 대주었던 모양이다. 청주 신봉동유적과 한무렵에 지은 천안 화성리(花城里)와 용원리(龍院里)움무덤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나온다.그러나 신봉동 무덤유적에서는 철기류 말고도 금동제 꾸미개 따위의 세공품(細工品)도 나왔다. 그 무렵 백제의 금동제 꾸미개 가운데 귀걸이는 가는고리에 더 작은 고리를 건 다음 샛장식과 드리개를 달아 만들었다. 신봉동과 맞붙은 봉명동 백제유적에서는 ꡐ대길(大吉)ꡑ이라는 새김글씨가 들어간 청동방울 동탁(銅鐸)이 나오기도 했다. 토기류도 짧은목항아리 뿐 아니라 한강유역 출토품같은 세발토기(三足土器)가 신봉동에서 나오는 등 다양한 유물을 거두었다. ▲ 백제의 움무덤을 형상화해서 지은 신봉동 백제유물전시관.
그런데 신봉동 무덤유적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어려운 수수께끼를 숙제로 받기나 한 것처럼 풀지 못하는 해답이 늘 기다렸다. 그 많은 무덤을 지은 까닭이 무엇이고, 시대가 늦은 윗쪽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철제무기류에는 무슨 사연이 담긴 것일까. 그 해답 가운데 하나, 무사집단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는다. 하기야 신봉봉에서 무덤 짓는 일이 끝나는 5세기 후반의 청주는 엄청 어수선했을 것이다. 백제가 도읍을 오늘의 공주 땅 웅진(熊津)으로 옮기는 혼란기였고, 신라는 코밑까지 다가와 지금의 청원군 문의와 낭성으로부터 청주를 옥죄고 있었다.

최근 발굴한 청원군 부강의 한 유적에서는 고구려군사들이 청주 이남에 다달은 당시의 정황이 보인다. 그런 난세의 틈새에서 청주 백제 세력 휘하의 군사들은 처절하리만큼 매서운 한판의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신봉동 명심산에 묻힌 이들이 바로 한판 싸움에서 목숨을 다친 가여운 백제인 군사들이었다.

   
▲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출토된 세발토기
살아 남은 유민(遺民) 더러는 청주에서 웅진으로 나앉아 백제문화에 상당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런 사정은 청주와 천안지역에서 처음으로 지었던 굴식돌방무덤이 웅진시대 백제 상류층 무덤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데서 확연히 드런난다. 변방의 세력들이 국가 기틀을 다잡은 백제 중심에 들었다는 사실을 잘 반영한 문화현상이 곧 굴식돌방무덤이었다. 어떻든 떠나갈 만한 세력이 다 자리를 비운 청주의 백제는 5세기 중반을 막 비켜 신라의 손아귀에 잡히면서 아주 두꺼운 역사의 장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세기에 신라의 말발굽에 밟히고, 이내 서원소경시대(西原小京時代)를 숙명처럼 맞아야 했다.

지금이라도 신봉동 큰길로 가면, 백제를 만날 수 있다. 유적이 거기 자리했거니와, 백제의 볼거리로 가득한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이 당신을 기다린다. 신봉동 무덤을 본따서 지은 유물전시관에는 청주 유적을 중심으로 한 찬란했던 백제문화가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청주의 백제 땅 명심산을 오르는 역사산책은 더욱 유익할 것이다.

*매지권
무덤을 지을 때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토왕으로부터 땅을  샀다는 가상(假想)의 문서다. 중국 후한대에 비롯한 매지권은 우리나라의 경우 백제 무열왕릉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일만문(一萬文)의 돈을 토왕과 토백 등에게 주고, 땅을 사들여 무덤을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  토지신은 도교의 지신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잎고리자루칼
고리의 형태에 따라 네모꼴에 가까운 것, 타원형인 것 등으로 나눈다. 타원형은 주로 백제계통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쇠로 만들었기때문에 앞에 철제(鐵製)라는 말이 들어간다. 신봉동 출토품도 물론 철제다. 철제세잎고리칼은 등급으로 보아 금장용봉(金裝龍鳳), 은장용봉(銀裝龍鳳), 동지금장세잎(銅地金裝三葉), 철지은장세잎고리자루칼(鐵地銀裝三葉環頭大刀)다음에 속하는 5등급이다. 길이는 60㎝가 넘는다.

*석장리 제철유적
철광석에서 직접 쇠를 뽑아내는 시설까지 갖추었던 유적이다. 단순히 철기를 만드는 단야(鍛冶)공정의 유적은 더러 발굴되었으나 제철유적은 우리나라에 아직 두 군데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석장리에서는 쇠를 뽑아내는 제련로(製鍊爐), 쇠를 녹이는 용해로(鎔解爐), 철기를 만드는 단야시설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원자재와 화학용품, 쇳덩어리 등이 나와 대규모의 고대 종합제철시설로 보고 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