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문화 빚은 역사의 질그릇 <임병무>

상당산성(上黨山城: 사적 제 212호)은 고도 청주역사의 산 증인이자 파수꾼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말까지 청주 역사의 이모저모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맑은 선비의 고장 청주를 한 눈에 조망하려면 상령산(上嶺山) 정수리를 감싸고 도는 상당산성에 올라야 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바람이 뒤엉켜 불어오던 이곳은 삼국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청주 역사의 질그릇이다.

마파람(동풍), 높새바람(북동풍), 하늬바람(서풍)이 번갈아 불어오다 돌연 역사의 가지에 부딪치고, 산자수명한 충청도 정취에 취해 또다시 정제되어 청풍명월이란 새 바람을 탄생시킨 것이다. 삼국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이룩된 충북의 문화는 그 자체가 여타지방과 다른 충북만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작용한다.  장수왕, 진흥왕, 성왕의 말발굽 소리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어도 그들이 각축을 벌이던 상당산성은 삼국의 체취를 내뿜으며 넉넉한 가슴으로 청주시민을 받아들인다.

▲ 청주상당산성옛지도 상당(上黨)이란 산성 이름은 '윗 무리' 로 해석된다. '윗 무리' 라면 바로 지배자 계층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러는 상당(上堂)이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윗 터' 라고 작위적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주위 4km에 이르는 상당산성은 과연 누가 쌓았을까.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설도 있고 김유신 장군의 셋째 아들인 원정공(元貞公)이 쌓은 서원술성(西原述城)이 다름 아닌 상당산성이라는 설도 있다. 필자가 지난 89년 청주시내, 오순균씨가 경영하던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의하면 궁예가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옛 성은 최초의 축조 인물을 밝히기가 꽤 어렵다. 더군다나 청주 일대는 삼국의 각축장이어서 성의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성을 빼앗은 자가 자기의 용도에 따라 성을 개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런데 그때 쌓은 고성은 지금의 상당산성이 아니라 현재의 산성 밖으로 내다 쌓은 성이다. 지난 6월 11일, 상당산성 서문 일대에서 발굴조사작업을 마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그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참으로 충격적이었다.즉 상당산성은 한 시기에 걸쳐 축조된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말, 고려말, 조선후기 등 여러 시기에 걸쳐 축조되었다는 사실이 이번에 밝혀진 것이다. 발굴조사결과 서문밖에서 숙종이전에 쌓은 고(古)상당산성이 진면목을 드러냈다. 궁예가 야망을 꿈꾸던 시대에 축조된 성벽도 상당수 나타나 ꡐ상당산성고금사적기ꡑ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에 속했으나 그후에는 신라에 빼앗긴 듯 하다. 백제의 상당산성은 역사의 부침을 따라 낭비성(娘臂城), 낭자곡성(娘子谷城) 등으로 호칭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상당산성으로 통칭되고 있다.현재의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 42년(1716)에 쌓은 석성이다. 물론 이전에도 성이 존재하였는데 숙종~영조 연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을 두고 삼국시대 쌓은 성이라고 설명하는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쌓은 성이라고 설명해야 옳다. 지난 82년 당시, 서원학회 회원인 이재준씨가 남문밖에서 사탁부(沙啄部) 명문기와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신라 6부중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와 같은 것이다. 이런 물증으로 보아 이곳이 신문왕때 설치된 서원경성(西原京城)이 아니냐는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문화층이 확실치 않아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상당산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나 오래전에 성밖에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토기편인 빗살무늬 토기편이 발견된 바 있고 지난 95년 충북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문밖에서 여러점의 빗살무늬 토기가 나와 벌써 선사시대부터 이곳이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입증시켰다. 상당산성엘 가려면 걸어가는 것이 제맛이다. 체력에 자신이 있으면 우암산을 넘어가는 등산로가 마련돼 있다. 이 코스가 조금 힘에 부친다고 생각되면 우암어린이 회관이나 명암 약수터에서 계곡을 타고 오르면 상당산성 등산로와 중간에서 합류한다.대체로 두시간 남짓 걸으면 산성의 서문에 이르게 된다. 이 코스조차도 부담스러우면 산성 입구까지 승용차를 타고 가서 주차를 한 후 남문으로 올라 성둑을 한바퀴 도는 코스가 적합하다. 대개 노약자들은 산성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만 해도 운동이 충분하다. 무작정 유흥삼아 도착하자마자 토속주를 마시고 노는 것은 바람직한 역사관광이 아니다. 산성의 일부라도 둘러보면서 우리고장의 역사를 반추해 보는 것이 어떨까. 성돌 틈 이끼에서는 아직도 삼국시대의 이야기가 스믈 스믈 피어 오른다. 그 역사의 체취는 산성의 역사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느껴진다. 이곳은 단순한 등산코스가 아니다. 등산과 더불어 우리고장의 역사를 배우는 복합적 문화공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산성 밖으로는 20~40m 정도 벌목을 해야 한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왜 나무를 베느냐고 할른지 모르지만 나무를 그냥 둘 경우 멀리서 산성이 보이지 않고 또 나무 뿌리가 성 밑을 파고 들어 훼손을 부채질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간격으로 벌목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산성은 그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계곡을 둘러싼 듯한 모양새로 이를 '포곡식(包谷式)산성' 이라고 하고 운동선수가 이마에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성은 '테뫼식 산성' 이라 부른다. 상당산성, 보은의 삼년산성은 전자에 속한다. 포곡식 산성은 일반적으로 퇴뫼식 산성보다 규모가 크다. 어떤 경우엔 포곡식과 테뫼식을 겸비한 양식도 발견된다. ▲ 상당산성남문 앞 잔디광장
상당산성 남문(控南門)앞에 이르면 잔디밭이 잘 조성돼 있고 그 중심부에 김시습(金時習)시비(詩碑)가 길손을 맞는다. 2000년 7월 문협청주지부와 청주시가 공동으로 해세운 시비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살라버리고 전국을 유랑하고 때로는 세상을 조롱하며 미치광이처럼 살다 생애를 마쳤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서 시를 남겼으나 그중 김시습의 시 유산성(遊山城)이 가장 유명하다. 김시습 시비에는 바로 유산성이 새겨져 있다.

[꽃다운 풀이 헤진 짚신에 파고 드는데/ 날 개이니 풍경이 청량하여라/ 들 꽃에는 벌이 와서 꽃잎에 입맞추고/ 살찐 고사리에 비 내려 향길 더하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말고 저녁내 바라보시게/ 내일이면 바로 남방으로 떠나갈 것일세]

▲ 매월당 김시습 시비 화강암과 오석이 한 쌍을 이루며 산성앞에서 길손을 맞는 김시습 시비는 상당산성의 풍광과 자신의 천재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의 '유산성'은 일반적으로 '산성에서 놀며'로 해석되나 문맥상 '산성에서 배우며'로 풀이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유(遊)자는 대개 '놀 유'로 쓰이나 '배울 유'의 뜻도 갖고 있다. 성으로 통하는 관문은 두말할 것 없이 성문이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큰 문이 있다. 흔히 남문, 동문, 서문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런 식의 방위적 명칭은 일본식이어서 달갑지 않다. 원래 남문은 공남문(控南門) 또는 공작루(拱雀樓)로, 동문은 진동문(鎭東門)으로 서문은 미호문(ペ虎門)으로 불리웠다. ▲ 상당산성서문(미호문)
남문에 이르러 동쪽 성벽으로 가든, 서쪽 성벽으로 먼저 가든 탐방객의 발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한 공남문을 통해 누각으로 올라선후 서쪽벽으로 올라가는 것이 순서다. 성문 주변으로는 반원형의 성을 돌출시킨 독모양의 옹성(甕城) 쌓아 성문을 보호하는게 통례인데 여기에는 그게 없다. 아마도 지형상 옹성을 축조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옹성이 없는 취약점을 3개의 치성(雉城)으로 보완한게 상당산성의 특징이다. 치성이란 성벽에서 튀어나온 부분으로 초소 역할뿐만 아니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대각선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성이다. 각이 있으면 치성이라 하고 둥근 형태면 곡성(曲城)이라 부른다. 등산 코스로 애용되는 성둑길에는 성둑을 따라 돌멩이가 릴레이를 하듯 박혀 있다. 이는 성둑위에 다시 쌓는 여장(女墻)의 흔적이다. 우리말로 '성가퀴' 라고도 하는 여장은 요철로된 부분을 통해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되 칠 수 있다.

▲ 남암문 세월따라 여장은 거의 허물어졌는데 남문 서쪽길로는 여장의 일부가 복원돼 있어 산성의 정취를 더해준다. 성 둘레에 담이 있는 길을 용도(甬道)라 부르는데 이 역시 옹성이 없는 산성의 취약점을 크게 보완하고 있다. 공남문을 들어서면 옹벽이 시야를 가로 막는데 이것이 남아 있는 용도의 일부다. 남문에서 서행을 하다보면 작은 문이 나타난다. 이것이 비밀통로 격인 암문(暗門)이다. 오늘날로 치면 비상구와 같은 것이다. 전시(戰時)에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특수 시설이다.따라서 암문은 비상시에 쉽게 폐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적군이 이를 눈치채고 암문을 통해 입성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암문은 남암문(南暗門)과 동암문(東暗門),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남암문을 지나 서쪽 벽으로 꺾어들면 청주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청주는 물론 증평, 오창, 미원으로 이어지는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서문을 일컬어 미호문이라 부른 것은 이곳의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겨 이를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쪽 성벽은 동쪽 성벽보다 훨씬 견고하다. 이로 보면 신라보다 오히려 백제,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듯 하다. 율량동을 바라보는 북쪽 벽은 자연 지세가 워낙 험하여 성벽의 높이가 턱없이 낮다.그러나 병법에는 허허실실의 작전이 수없이 등장한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의병(疑兵)작전으로, 한때 상당산성을 점거하고 있던 견훤을 친 사실이 등장한다. 왕건이 "상당은 험하여 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어떻게 하는게 좋은가" 하고 묻자 복지겸은 "험한 지형을 믿는 자는 패한다고 했으니 저 병사들은 다만 그 지세를 믿고 서북을 방비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니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의병(疑兵) 작전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고 대답했다.왕건은 복지겸의 말대로 무농정(務農亭:청주한씨의 시조 한란이 지은 정자로 방서동에 있음)에 군사를 집결시켜 쉬게한 다음, 선도산 계곡을 타고 남쪽벽에 도달했다. 산성 남문밖 산봉우리에서 진을 치며 군사가 많은 것처럼 기치를 높이 들고 실제로는 북벽을 쳤다. 성은 왕건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목 베어 버린자가 셀 수 없어 내(川)을 이루니 이를 혈천(血川)이라 했다. 상당산성고금사적기는 이 외에도 산성의 여러 가지 정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영조 21년(1774), 상당산성의 승장(僧將) 영휴(靈休)가 쓴 이 책은 궁예와 견훤의 상당산성, 정북동 토성 축성 및 당시 전투상황을 적고 있다.주인과 나그네의 대화형식을 빌은 야사체이긴 하나 당시 성내에 구룡사, 남악사 등이 있었다는 것은 정사와 일치하는데다 향토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여러 사실들을 밝히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성내에서 생산되는 쌀은 1만3천5백여섬에 이르고 해마다 장을 담그는 것이 90여 단지에 1백섬이며 동서에 사는 주민이 50여호에 이른다고 했다. 이로보면 상당산성은 삼국초기서부터 후삼국,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청주지역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동암문
동쪽벽은 남쪽으로 사행(蛇行)을 하다 연못을 지나며 공남문쪽으로 숨이 차도록 이어 달리면서 성벽을 합친다. 동쪽벽에는 눈썹돌이라 부르는 미석(眉石)이 간헐적으로 남아 있다. 미석은 성벽 끄트머리서 약간 돌출된 모양으로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성벽과 그 위에 다시 쌓은 여장의 초석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성벽위에는 미석이 있는 여장이 있고 미석이 없는 여장이 있는데 상당산성은 전자에 속한다.  

동쪽 성벽 진동문 윗쪽으로는 동암문이 있다. 이 역시 남암문과 더불어 비밀통로 역할을 하였는데 암문 내벽에는 양덕부 패장 한량(梁德溥 牌將 閑良)이라는 명문이 눈길을 끈다. 양덕부는 이인좌의 난때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이 관기인 월례(月禮)와 함께 있는데 믿는 장수인 양덕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덕부의 이름이 암문 내벽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암문의 축조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사실명제인 셈이다. 그러나 양덕부는 반군에게 청주읍성의 문을 열어 주었으니 공보다 허물이 더 크다. 양덕부의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 반쯤 지워졌는데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 2002년 상당산성 서문일대 발굴조사 결과 궁예에 의해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삼각지를 형성하며 새로 나타났다. 진동문을 지나 서행을 하면 동장대(東將臺)인 보화정(輔和亭)이 보인다. 장대란 일종의 지휘소다. 상당산성엔 동장대와 서장대가 있는데 지난 92년 동장대는 복원되었으나 제승당(制勝堂)이라 불린 서장대는 확인만 되었을뿐 아직 복원치 못했다. 상당산성을 지키던 책임자급 장수는 병마절도사, 또는 병사우후(兵使虞侯)다. 우후란 병마절도사 다음가는 무장으로 병사의 유고시에는 그 직책을 대행했다. 오늘날의 부장대우, 과장대우 등 '대우' 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평소에는 충청병영(현 중앙공원)에 기거하다 전시에는 상당산성으로 자리를 옮겨 청주를 방어했던 것이다. 산성과 읍성이 대칭꼴을 이루며 마을을 방어했던 것은 우리나라 성(城) 경영의 한 특징이다. ▲ 동장대 보화정
상당산성은 조선시대에도 여러차례 개축되었다. 특히 숙종~영조(18세기)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다. 오늘날의 산성모습은 대체로 이 당시 개축한 형태가 골격을 이룬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산성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만큼 옛 모습을 간직한 산성도 매우 드물다. 청주시는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 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사적 지정면적은 5만4천7백평인데 이중 국,공유지는 2만3천1백11평이고 사유지는 3만1천5백83평이다. 이 사업을 추진하려면 우선 사유지부터 매입한 연후 발굴조사를 실시하는게 순서다.

지금까지는 성곽과 더불어 진동문(동문), 미호문(서문), 공남문(남문) 및 치성, 동장대 등을 복원하였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기 위해선 할 일이 태산이다. 그래서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은 오는 2010년까지 10개년 사업으로 모두 3백87억원을 들여 추진된다. 관아는 물론이고 병기고, 포루, 민가, 절(구룡사, 남악사) 등이 복원될 예정이며 이외에도 전통무예관, 전통놀이마당, 씨름장 등을 마련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과 휴식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청사진을 펼쳐놓고 있다.  <임병무>

   
▲ 산성마을 앞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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