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上黨山城: 사적 제 212호)은 고도 청주역사의 산 증인이자 파수꾼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말까지 청주 역사의 이모저모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맑은 선비의 고장 청주를 한 눈에 조망하려면 상령산(上嶺山) 정수리를 감싸고 도는 상당산성에 올라야 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바람이 뒤엉켜 불어오던 이곳은 삼국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은 청주 역사의 질그릇이다.
마파람(동풍), 높새바람(북동풍), 하늬바람(서풍)이 번갈아 불어오다 돌연 역사의 가지에 부딪치고, 산자수명한 충청도 정취에 취해 또다시 정제되어 청풍명월이란 새 바람을 탄생시킨 것이다. 삼국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이룩된 충북의 문화는 그 자체가 여타지방과 다른 충북만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작용한다. 장수왕, 진흥왕, 성왕의 말발굽 소리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어도 그들이 각축을 벌이던 상당산성은 삼국의 체취를 내뿜으며 넉넉한 가슴으로 청주시민을 받아들인다.
상당산성 남문(控南門)앞에 이르면 잔디밭이 잘 조성돼 있고 그 중심부에 김시습(金時習)시비(詩碑)가 길손을 맞는다. 2000년 7월 문협청주지부와 청주시가 공동으로 해세운 시비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살라버리고 전국을 유랑하고 때로는 세상을 조롱하며 미치광이처럼 살다 생애를 마쳤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서 시를 남겼으나 그중 김시습의 시 유산성(遊山城)이 가장 유명하다. 김시습 시비에는 바로 유산성이 새겨져 있다.
[꽃다운 풀이 헤진 짚신에 파고 드는데/ 날 개이니 풍경이 청량하여라/ 들 꽃에는 벌이 와서 꽃잎에 입맞추고/ 살찐 고사리에 비 내려 향길 더하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말고 저녁내 바라보시게/ 내일이면 바로 남방으로 떠나갈 것일세]
남문에 이르러 동쪽 성벽으로 가든, 서쪽 성벽으로 먼저 가든 탐방객의 발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한 공남문을 통해 누각으로 올라선후 서쪽벽으로 올라가는 것이 순서다. 성문 주변으로는 반원형의 성을 돌출시킨 독모양의 옹성(甕城) 쌓아 성문을 보호하는게 통례인데 여기에는 그게 없다. 아마도 지형상 옹성을 축조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옹성이 없는 취약점을 3개의 치성(雉城)으로 보완한게 상당산성의 특징이다. 치성이란 성벽에서 튀어나온 부분으로 초소 역할뿐만 아니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대각선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성이다. 각이 있으면 치성이라 하고 둥근 형태면 곡성(曲城)이라 부른다. 등산 코스로 애용되는 성둑길에는 성둑을 따라 돌멩이가 릴레이를 하듯 박혀 있다. 이는 성둑위에 다시 쌓는 여장(女墻)의 흔적이다. 우리말로 '성가퀴' 라고도 하는 여장은 요철로된 부분을 통해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되 칠 수 있다.
동쪽벽은 남쪽으로 사행(蛇行)을 하다 연못을 지나며 공남문쪽으로 숨이 차도록 이어 달리면서 성벽을 합친다. 동쪽벽에는 눈썹돌이라 부르는 미석(眉石)이 간헐적으로 남아 있다. 미석은 성벽 끄트머리서 약간 돌출된 모양으로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성벽과 그 위에 다시 쌓은 여장의 초석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성벽위에는 미석이 있는 여장이 있고 미석이 없는 여장이 있는데 상당산성은 전자에 속한다.
동쪽 성벽 진동문 윗쪽으로는 동암문이 있다. 이 역시 남암문과 더불어 비밀통로 역할을 하였는데 암문 내벽에는 양덕부 패장 한량(梁德溥 牌將 閑良)이라는 명문이 눈길을 끈다. 양덕부는 이인좌의 난때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이 관기인 월례(月禮)와 함께 있는데 믿는 장수인 양덕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덕부의 이름이 암문 내벽에 새겨져 있는 것은 암문의 축조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사실명제인 셈이다. 그러나 양덕부는 반군에게 청주읍성의 문을 열어 주었으니 공보다 허물이 더 크다. 양덕부의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 반쯤 지워졌는데 누가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상당산성은 조선시대에도 여러차례 개축되었다. 특히 숙종~영조(18세기)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다. 오늘날의 산성모습은 대체로 이 당시 개축한 형태가 골격을 이룬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산성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만큼 옛 모습을 간직한 산성도 매우 드물다. 청주시는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 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사적 지정면적은 5만4천7백평인데 이중 국,공유지는 2만3천1백11평이고 사유지는 3만1천5백83평이다. 이 사업을 추진하려면 우선 사유지부터 매입한 연후 발굴조사를 실시하는게 순서다.
지금까지는 성곽과 더불어 진동문(동문), 미호문(서문), 공남문(남문) 및 치성, 동장대 등을 복원하였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기 위해선 할 일이 태산이다. 그래서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은 오는 2010년까지 10개년 사업으로 모두 3백87억원을 들여 추진된다. 관아는 물론이고 병기고, 포루, 민가, 절(구룡사, 남악사) 등이 복원될 예정이며 이외에도 전통무예관, 전통놀이마당, 씨름장 등을 마련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과 휴식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청사진을 펼쳐놓고 있다. <임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