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 가는 길엔 달맞이꽃이 핀다. <황규호>

청주에서 팔결들하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옛부터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 땅이 걸기로 소문난 팔결들은  미호천(美湖川)유역 으뜸의 곡창이다. 그 곁으로 미호천 지류인 까치내(鵲川)가 바짝 붙어 지나간다. 팔결들 서쪽 끝자락을 지나는 까치내는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청주 시가지를 꿰뚫고 북류한 무심천을 이내 만났다. 그러니까 팔결들은 세 갈래 물길이 몰린 합수머리께의 들녘이다. 장마가 들 때마다 거름기를 머금은 모래흙이 쌓여 넓은 들을 이루었으니, 충적평야(沖積平野)이기도 했다. 그만하면, 팔결들 비옥한 까닭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팔결들녘의 정북토성. 네모꼴 토성 위로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성벽의 한풀이 꺾인지 오래다. 그 들녘 한쪽에는 아주 옛날에 흙으로 지은 토성(土城)하나가 있다. 청주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이다. 행정구역상의 위치는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362번지에 이르는 지역이고, 거기 토성이 들어 앉았다. 팔결들을 다 놓고 보면, 남쪽으로 좀 치우쳤다. 까치내 둑방에서는 여남은 걸음이면 닿을 듯 가깝다. 한창 벼가 자랄 무렵이라, 들녘은 한점 여백도 없이 온통 검푸렀다. 그 들녘 저만치의 토성은 푸른 언덕처럼 보였다.벼가 꽤나 실히 자란 무논 사이로 곧게 뻗은 농삿길을 따라 나섰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라 그랬는가, 끝없이 긴 논배미에 날개를 접은 백로 한 마리가 없다. 그래서 들녘이 적막하더니만, 일부러 찾아간 성안마을에도 인적조차 얼씬하지 않는다. 오랜 풍상(風霜)을 겪은 탓에 성벽(城壁)의 한풀은 다 꺽이고, 잡목이 키를 재기라도 하듯 고목으로 자랐다.세월은 참으로 무상하여 역사를 망각한 지가 오래다. 나무가 들어선 성벽이 지적부에 모두 임야로 표시되었으니, 어찌 세월이 무상치 않다 하랴. 땅도 조각조각 갈라져 대지만도 22필지다. 성안마을 집은 30여 가호, 장미꽃나무 울타리를 정갈하게 가꾼 양옥도 있다. 그러나 거의가 농가인 듯하다. 모양새가 조금은 가파라 보이는 언덕같은 성벽이 마을을 감싸았다. 그래서 마을은 아늑했다.물이 넉넉한 샘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과연 요새(要塞)답다. 그런데 붙잡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간단한 내력을 적은 팻말도 보이지 않는다. 한길에서 농삿길로 들어오는 어귀 삼거리에 섰던 글씨 큰 '정북동토성' 돌푯말 말고, 다른 표지는 본 기억이 없다.팔결들은 곡식이 알알이 영그는 풍요로운 들녘이다. 고즈넉한 정적이 흐르는 정북토성에는 역사의 환상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었다면, '녹색의 장원(莊園)' 이니 하는 따위의 예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북토성같은 유적이면 영주(領主)의 고성(古城)쯤으로 여기고, 일찍 볼거리 장사에 나섰을 지도 모른다.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픽션의 인물까지도 팔아먹는 그들이다. 나쁘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깡그리 잊고 살아온 우리네 처지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또 역사와 더불어 사는 그들 일상의 생활이 부러워서 해본 소리다.정북동토성이 제대로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토성의 존재를 전혀 모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슴푸레 알기는 했으나, 지난 1976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성벽 일부를 발굴하고 부터 비로소 실체가 드러났다. 평지(平地)에 지은 정북동토성의 평면은 좀 기다란 네모꼴인 장방형(長方形)에 가깝다. 둘레는 655m에 이른다. ▲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의 정북동토성발굴현장. 곡성을 갖춘 고대 평지토성인 정북동토성은 마한의 세력집단이 지은 것이다.
기초가 되는 터를 따로 쌓지 않고, 그냥 제바닥부터 4m 높이로 지어올렸다. 거의 직선을 이룬 성벽의 길이는 동벽 180m, 남벽155m, 서벽160m, 북벽 160m다. 성벽 윗부분에는 너비 2m 정도의 길이나 성벽을 한바퀴 돌 수도 있다. 성벽에는 굽어지게 지은 곡성(曲城)을 만들어 놓았다. 36~48m 간격을 두고 지은 곡성은 문자리(門址)에 하나씩 따라붙었고, 또 문자리와 성벽 모서리 사이에도 하나씩을 두었다. 그래서 12개의 곡성, 4개의 문, 4개의 모서리마다에 각루(角樓)를 둔 정북동토성은 기본틀을 두루 갖춘 옛적 고대의 성곽이었다.

그 정북토성은 이른바 판축기법(版築技法)을 써서 지었다. 판축은 가운데다가 기둥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널빤지를 대어 흙다짐으로 성벽을 쌓는 고대의 토목공법이다. 그런 흔적은 모두 발굴과정에 확인되었다. 흙다짐에는 주로 황갈색 개흙이 들어갔다.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따위의 유물이 서문(西門)자리 곡성 아랫도리 흙다짐에서 나왔다. 그리고 서벽 서남쪽 바닥에서는 쇠뿔손잡이토기(牛角把手附土器)를 포함한 여러가지 토기조각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 정북동토성에서 나온 삼한시대의 토기와 토기편. 우리는 정북동토성에서 나온 토기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두들김무늬토기나 쇠뿔손잡이토기 따위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나름의 표지문화(標識文化)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토기류를 표지문화로 한 원삼국시대는 서력기원 무렵에 시작해서 서기 300년까지를 아우른다. 그 시기는 바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해당된다. 정북동토성이 원삼국시대나 삼한시대에 지었을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토성 발굴 때 서문자리 바닥에서 거둔 숯을 시료(試料)로 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 그것이다. 미국 지구연대연구소가 과학적으로 측정한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870년 전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정북동토성을 지은 시기의 한가운데는 서기 130년이라는 것이다.그 무렵 백제는 오늘의 서울지역인 한성(漢城)에 머물렀다. 영역을 넓게 다잡아놓은 상태는 아니었고, 백제국(百濟國)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한(馬韓)40여국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 그 마한사회의 중심세력은 지금의 천안(天安)지역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목지국(目支國)이었다고 한다. ▲ 마한 사람들이 지은 무덤의 하나인 주구움무덤. 주검을 움우덤에 넣어 묻은 뒤 주변에 도랑을 판 주구움무덤은 마한의 옛땅에만 나타난다.
그렇다면 삼한시대의 청주지역은 목지국의 이웃이다. 더구나 최근 천안지역과 청주지역에서는 3세기 후반까지 지었던 주구움무덤(周溝土壙墓)*이 발굴되었다. 청주지역의 주구움무덤은 정북동토성에서 가까운 무심천과 까치내 합수머리 건너 송절동(松節洞) 이웃 야산에 떼지어 모였다. 그리고 까치내 건너 청원군 오창면 송대리(松垈里)에서도 주구움무덤을 발굴한 일이 있다.

주구움무덤은 그냥 주구묘(周溝墓)라고도 부른다. 널에 넣은 주검을 흙구덩에 묻은 뒤 그 주변에 눈썹 문양의 도랑을 돌려 지은 무덤이다. 둥근밑목항아리(圓底短頸壺)따위의 껴묻거리가 나온 송절동 야산 일대의 주구움무덤들은 지난 1993년과 1944에 걸쳐 두 차례를 발굴했다. 한 무덤에서 거둔 숯을 가지고 분석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서 그 연대를 1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 사이로 가려냈다.

정북동토성 연대측정 수치와 비슷한 시기다. 그리고 보면, 송절동 야산에 묻힌 주구움무덤의 주인들이 정북동토성을 짓지 않았을까. 미호천유역 넓은 평야의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토성을 지은 그들은 국가의 초기단계라고 말하는 성읍국가(城邑國家)의 기틀도 함께 다진 진정한 마한인이었을 것이다.

정북동토성으로 가는 또 다른 길 까치내 둑방에는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핀다. 여름 저녁나절에 가면, 귀가 밝지 않아도 달맞이꽃 망울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기서 정북동토성을 싸잡아 바라본 미호천유역의 들녘 풍광은 가히 목가적(牧歌的)이다. 걸어서 가면 더 좋은 역사여행 길이 될 것이다.   <황규호>

*정북동토성
성읍국가가 일어나고 고대 전제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할 무렵에 지은 우리나라 제1기의 성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평지에 지은 네모꼴 토성이라는 특성을 지녔다. 한(漢)이 한반도 북부에 군현(郡縣)을 세우면서 지은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낙랑의 치소(治所)였던 평양 대동강 남쪽의  토성리토성 등이 냇가 평지에 지은 네모꼴 토성이다. 청주 정북동토성은 서울 몽촌토성(夢村土城)및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과 더불어 남한지역에 얼마 남지 않은 평지 토성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
흔히 14C라는 부호로 표기한다. 방사성을 이용하여 절대연대(絶對年代)를 밝히는 작업이다. 생물체가 죽으면 14C의 교환이 다시 이루어지지 않고, 무너지기 때문에 축적되었던 숫자도 점점 줄어든다. 그때 남은 14C의 농도를 측정하여 물체가 죽은 연대를 계산해 내는 것이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다. 처음에는 고체탄소(숯)하나만을 가지고 방사능을 측정했으나, 지금은 기체나 액체도 시료로 쓰고 있다. 측정이 가능한 연대는 40,000~ 50,000년까지다.

*주구움무덤
그 조사는 천안 청당동유적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 이후 청주 송절동․공주 하봉리(下鳳里)등 충청도 내륙에서 확인되었고, 서해안에서도 무덤을 찾아냈다. 그런 여러 주구움무덤 조사에서 둥근밑항이리를 주된 껴묻거리로 하는 주구움무덤은 마한사회와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무덤은 경사가 진 언덕에다 지었다. 그리고 주검을 널에 넣어 묻으면서 흙구덩에 별도의 나무터널을 갖추었다. 충청도 내륙지방과는 좀 다른 유형의 주구움무덤이 최근 보령 관창리(貫倉里)와 전남영광등 남부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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