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고려 광종 13년, 서기 962년.
당시 청주는 화려했던 통일신라시대 서원경 시절을 뒤로 하고, 후삼국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생긴 전쟁의 상처를 막 씻어가고 있었다.
이 때 청주읍성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용두사(龍頭寺)에서는 커다란 불사의 마감을 앞두고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동안 사찰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게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나무로 된 당간을 쇠로 새롭게 만드는 불사와 관련된 회의였다.
이것은 높이가 60척(약 20m)이나 되는 고려 최대의 철당간으로, 당시 최고 수준이던 청주지역의 금속 주조술과 철 생산량이 아니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큰 불사였다.
논란거리는 3번째 철통에 넣기로 한 당간기(幢竿記)의 마지막, 즉 조성년도에 관한 것이었다.

“황제국 송(宋)의 연호인 건융(建隆) 3년으로 하여야 할 것이오.”
“인접한 신흥강국 요(遼)의 연호인 응역(應曆) 12년으로 하여야 마땅하오.”
이런 갑론을박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이 불사의 주도자 당대등 김희일이 나섰다.
“지금까지 우리 청주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주적으로 지역을 지켜오고 발전시켜 왔소. 지금 우리나라는 영민하신 광종황제가 나라의 새로운 기틀을 차분히 정비하고 계시지 않소. 굳이 외국의 연호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소. 지금 고려는 당당히 자주국임을 나타내는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쓰고 있지 않소. 당연히 준풍으로 하여야 할 것이오.”
일순 장내는 조용해 졌고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그동안 꿋꿋했던 청주인의 기개를 되새기고 있었다.
마침내 불사는 마무리되고 거대한 철당간은 그 세 번째 몸통에 그동안의 건립과정과 참여한 인물 그리고 마지막에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새긴 채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維 峻豊三年 太歲壬戌 三月 二十九日 鑄成’
준풍 3년 임술년 3월 29일 쇠로 만들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 사극 ‘제국의 아침’은 사대주의 사관이 지배했던 조선사에서 탈피하여 자주적이고 활달한 기상을 지녔던 고려시대의 위대하고 장쾌했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은 ‘준풍’이라는 연호를 쓴 고려 광종의 자주정신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유산이다.
이같은 문화재가 청주의 중심을 잡고 서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일부에서 충북인의 기질에 대해 소극성, 아웃사이더라는 비판을 제기하곤 한다. 어쩌면 신중한 체면의식이 부정적으로 비춰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고려의 자주정신이 청주정신, 충북정신으로 이어지는 상징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기회에 용두사지철당간에 새겨진 ‘준풍’이라는 글자를 찾아보며 한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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