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은 마지막 떠날 때 대부분 눕거나 앉아서 숨을 거두지만 서서 눈을 감은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뜰 앞을 거닐다 문득 “오늘 가야겠구나” 독백을 하고 몇 발짝을 옮기다가 선 채로 입적한 이가 있는가 하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죽음을 맞은 이도 있습니다.
스님들 중 어떤 이는 “나고 죽음이 없는 세계로 가니 참으로 즐겁다”고 깨침의 열반송을 한 이가 있고 스승에게서 관을 선물 받고는 덩실덩실 춤을 춘 선사, 스스로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소신공양(燒身供養)한 선사, “극락이 보이지만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고 선언한 선사도 있습니다.
중국의 혜안국사는 임종에 이르러 모든 소장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내가 죽거든 시신을 숲 속에 놓아 들불에 타도록 하라” 유촉(遺囑)하였고 청활스님은 문도(門徒)들을 불러 “내 시신을 벌레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말라”며 반석 위에서 앉은 채로 열반에 듭니다.
또 조선조 고한희언선사는 “공연히 이 세상에 와서 지옥의 찌꺼기만 남기고 가니 내 살과 뼈는 저 숲 속에 버려 산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고 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바(娑婆)의 대중들에게 죽음이란 삶의 끝이요, 이승과의 이별이지만 수행 득도한 선사들에게 죽음은 헌옷을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기쁨인 것입니다. 치열한 구도 속에 일생을 산 스님들은 헌 옷을 벗어 던지듯 육신을 버리고 자성(自性)의 근원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세속에 때묻은 중생이 큰스님들을 마음속으로 경외(敬畏)해 마지않는 것은 바로 그 분들의 삶에 대한 외경심(畏敬心)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근년에 와 우리 사회의 장례문화는 인식이 많이 달라져 화장을 선호하는 이들이 늘고는 있지만 아직도 매장을 고집하는 유교의 전통적인 관념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 합니다. 좁은 국토에 해마다 무덤이 늘어만 가는 현상은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언젠가는 이 나라가 묘지로 뒤덮일 날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겠습니다.
청주시가 최근 조사한 청주시내의 묘지 총 면적은 66만여㎡로 20만평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는 청주시 전체 면적의 2천 분의1로 축구장 19개를 만들 수 있는 면적이라 하니 묘지문제가 이미 발등의 불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청주시가 늘어만 가는 묘지 실태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화장(火葬)을 통해 장례문화를 개선키로 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조처라고 하겠습니다.
때마침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간에도 화장을 긍정시하는 인식의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청주시의 장례문화 개선캠페인은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전통을 이어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전통과 문화도 현실에 맞지 않을 때 개선을 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 본사고문
김영회 고문
yhk939@hanmail.net
화장, 저는 아직 싫습니다.
불교가 원리를 깨우치는 철학이라고 한다면 유교는 인간사회의 법도와 질서를 중시여기는 사상이자 사회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나라의 황제 ->왕->제후-> 관리-> 신하등등의 철저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가부장적 위계 질서하의 공동체 유지논리는 임금과 신하,남편과 아내,아버지와 아들등을 철저히 주종의 관계로 구별하여 윗사람은 덕과 인으로 다스리고 아랫사람은 충과 효와 순종으로 받들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수평적 관계와 평등을 추구하는 21세기의 페미니스트들에겐 신분질서를 전제로 하는 유교와의 교집합은 매우 적어보입니다.
장례문화도 조상과 제사를 귀히 여기는 유교문화의 영향이 크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죽을때 선뜻 화장하겠다는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잡초가 무성하고 떼가 벗겨져 볼품없는 한귀퉁이 무덤이라도 흔적을 남겨 아주 몇년만큼만 이승에서 부대끼던 사람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이승에서의 갖가지 緣이 아무리 속절없고 구질구질하다해도,저는 끝까지 오래 살고 초라한 무덤하나 희망하렵니다. 자손과 사회에 누를 끼친다해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