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무>

청동기문화 꽃피운 청주 역사의 모태
소백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서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청주지역 일대는 주산인 우암산이 동쪽에서 동풍을 막고 그 대칭선상에 있는 부모산이 서풍을 차단하며 그 중간에 갈비 살 같은 기름진 땅을 형성하고 있다. 우암산 보다 덩치가 작기는 하나 청주지역으로 진입하자면 필히 부모산 기슭을 지나야 한다. 오늘날 강서 검문소가 여기에 있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길목을 차단하면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 부모산 입구 표지석 지금은 청주로 진입하는 길이 여러 곳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청주와 연기 지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래서 부모산은 청주문화의 모태이자 이를 지키는 첨병역할을 했다. 청주지역에서 청동기 유적으로는 부모산 남쪽 능선에 자리잡은 '비하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검은 간토기(黑陶長頸壺), 덧띠토기, 곱은 옥, 대롱 옥 등과 더불어 이른바 '한국식 동검'이 출토된바 있다.고운 바탕 흙으로 만든 검은 간토기는 흑연, 망간 등 광물질 안료를 발라 구워 표면이 검고 매끄럽다. 둥근 몸통에다 모들리아니의 여인처럼 목이 긴 것이 특징이다. '한국식 동검'은 '요녕식 동검' 에 비견되는 말이다. 요녕식 동검은 비파모양을 하고 있어 흔히 '비파형 동검' 이라고도 불린다. 그 동검은 세월이 흐를수록 비파모양이 축약되어 날이 좁은 '세형 동검' 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우리 나라에서 주로 출토됨으로 '한국식 동검' 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것이다.BC 4세기경부터 부모산은 청동기 문화의 꽃을 피워 오다 그 역사의 맥락을 송절동 원삼국 고분, 신봉동 백제고분 등으로 전하고 있다. 아양산(我養山)은 부모산의 옛 지명이다.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기 이전, 마한(馬韓)에는 56개국이 있고 그 연맹체를 이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부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아양국' 이 있었다는 학설이 있으나 확실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다. ▲ 청주 시가지에서 바라본 부모산 전경

부모산 진달래는 청주 지역으로 찾아드는 봄을 안내한다. 꽃잎 향기도 좋지만 무엇보다 역사의 향기에 취하여 부모산을 에워싸고 있는 부모산성조차 하품을 한다. 배달의 얼을 살짝 감추고 있기 때문일까. 성둑을 헤치며 피어나는 진달래의 모진 생명력에 다시 한번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허물어진 성둑을 따라 걷다보면 역사의 향기와 춘색에 취해 더욱 나른해 진다. 아양국의 영화(榮華)는 어디로 갔으며 성을 지키던 초병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다만 진달래의 뒤를 이어 철쭉이 붉은 울음을 터트리고 냉이, 씀바귀 등 봄나물이 성돌 틈에서 무심히 고개를 내민다.

청주시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 산에 오른 기억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시절, 성둑에 앉아 김밥을 먹고 성 돌을 뒤지며 보물찾기를 하던 추억이 봄 길을 따라 아련히 펼쳐진다. 두보(杜甫)의 시에서 보듯 "나라는 여러 번 바뀌었어도 산천은 그대로" 이다.(國破山河在)

▲ 부모산성 부모산을 말하자면 부모산성(父母山城)을 빼놓을 수 없다. 둘레가 1천 2백 20m로 비교적 큰 성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갈라져 내려간 4개의 산 능선을 둘러쌓은, 전형적인 삼국시대산성으로 전체적인 모양은 역삼각형 구도다. 이곳에서는 백제시대의 회백색 연질토기편, 고구려 계통의 붉은 색 격자문(格子文) 토기편 , 신라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함께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삼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삼국시대의 복합성(複合城)으로 여겨진다.이 산성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주성(主城)에 딸린 '아들 성' 이 발견된 점이다. 지난 1992년, 이곳을 조사한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주성에서 동남쪽, 서쪽, 북쪽으로 1백m 쯤 떨어진 곳에서 초소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둘레 60m 가량의 '아들 성' 3채를 발견했는데 매우 희귀한 양식으로 평가된다. 부모산성은 백마고지처럼 평야지대에 바가지모양으로 엎어져 있다. 그러기에 기름진 들판, 미호평야와 천험의 요새인 이 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삼국이 피나는 전투를 벌인 것 같다.몽고군의 침입시, 동네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왔는데 안개가 자주 끼는 덕택으로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모두 살았다고 한다. 한번은 성내로 피난 온 주민들이 물이 떨어져 죽을 판이었는데 갑자기 샘이 솟아나 이 물을 먹고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은혜가 마치 부모와 같다 하여 이때부터 '부모산' 으로 불렀다는 얘기다.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산 중턱에 있는 연화사의 물맛은 변함 없으니 부모산이라 이름 지은 연유를 짐작할 만 하다. <임병무> ▲ 부모산 연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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