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무>

물길의 변천
무심천의 물길은 홍수 등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물길의 바뀜은 무심천 뿐만 아니라 황하, 양자강, 미시시피강이 그렇고 한강, 금강, 낙동강 등도 예외는 아니다. 잦은 홍수로 인한 하천의 범람은 자연히 물길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놓은 것이다.    

구한말과 일제초기, 그리고 현재의 지도를 비교하면 무심천의 물길과 제방의 위치가 각기 다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청주읍성도를 보면 원마루에서 합쳐진 냇물이 석교동으로 곡류하다 땅속에 묻혀있는 남석교 아래를 지나 고개를 틀어 읍성 서문 밖으로 북류하여 까치내로 흘러 들었다.

그러니까 서문시장 일대가 무심천의 물길에 해당한다. 무심천은 청주 읍성의 청남문(남문)과 청추문(서문)을 감돌아 가며 읍성의 자연적 해자(垓字) 역할을 했다. 해자란 성밖 둘레에 적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파 놓은 연못 등을 말한다. 현재의 물길과 비교하면 훨씬 도시 안쪽으로 물이 흘렀다.

하천의 잦은 범람으로 자연제방은 점점 유실되고 따라서 물길도 조금씩 방향을 바꾸었다. 국유 하천인 무심천이 이같이 물길을 자꾸 바꾸자 당국에서는 환지 작업을 벌었다. 천변이 상가로 변하고 국유지로 물길이 흘러드니 대지의 용도변경과 환지 작업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 시민의 날 행사가 치러지는 무심천 둔치 청주시의 한 실무자에 따르면 이 작업이 일제초기인 192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서문시장 일대의 천변 땅을 용도 변경시켜 모두 개인에게 불하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래 전, 청주시 당국에서 무심천 일대를 측량 조사한 결과 엉뚱하게도 국유지의 한 가운데로 무심천이 흐르니 냇물에게 토지세를 물릴 수도 없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제방을 제대로 쌓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두었으니 홍수가 날 때마다 물길의 방향이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 현재의 서문시장과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구한말까지 인공제방은 은행로 자리의 석교제방과 모충동 입구까지 직선제방이 있었을 뿐 서문교 북쪽은 자연제방이었다. 서문교 북쪽 제방은 1921년에 개축하였으나 그 규모가 작고 단단하지 못해 홍수 때마다 범람하였다. 오오꾸마 쇼지가 언급했듯 무심천은 툭하면 전답을 휩쓸어 주위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남부교외(南部郊外)로부터 일직선으로 흘러와서 제방의 동쪽 근방에 부딪치며 왼쪽으로 머리를 틀다 남석교 밑을 고요히 흘러 서쪽산 기슭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꿔 사창리 기슭을 씻기고 잡아 틀어 북쪽으로 흘렀다" <오오꾸마 쇼지, 청주연혁지>일제 때 청주의 근대사 기록 중 상당부분을 일인이 저술한 책에 의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1918년 대홍수로 남쪽 전답사이에 하나의 지류가 형성되었다. 장마 때마다 양 기슭의 땅이 침식되어 하상은 점점 넓어지고 몇 해 안 가 지류는 본류로 되어 버리고 본류는 점차 메워져 둔치로 변해버렸다.상류의 변천은 하류에도 영향을 주어 사창리 근방의 유역이 차차 변하여 시장과의 중간에 본류가 관통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말하는 사창리는 현재의 사창동이 아닌 사직동을 의미한다. 무심천은 건천(乾川)이나 장마 때면 물이 급격히 불고 유속(流速)이 매우 빠르다. 수세(水勢)가 화살같이 빨라 서문다리 서쪽을 뚫고 지나가기 일쑤여서 토목 관계자들을 자주 울렸다고 한다. 교외는 말할 것도 없이 시내로 들여 닥치기 일쑤여서 1921년 지방비로 제방을 쌓고 그후에 다시 근본적인 개수작업을 폈다.오래 전에 무심천의 한 갈래는 읍성의 동쪽으로 흘렀다는 설이 있으나 별로 신빙성이 없다. 우암산 기슭으로 직류하여 청주농고 앞에서 곡류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충북도청 연못 부근의 옛 명칭이 '잉어배미'인 점을 꼽고 있으나 근거가 미약하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우암산에서 당산을 거쳐 중앙공원까지 산맥이 연장돼 있고 중앙공원 부근에 큰 구릉지가 형성되어 무심천이 읍성 동쪽으로 흘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구 법원 앞에서 당산까지의 명암로는 경사가 크고 이곳서 중앙공원 동문입구, 즉 기업은행 쪽의 직선부는 다소 지형이 높아 이선을 경계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하수구 방향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무심천의 한 갈래가 석교동~서운동~수동~우암동으로 직류했다는 설은 믿기 어렵다.다시 찾은 벚꽃동산'멀리서 도끼질 소리가 들려온다. 쓸모 없게 된 벚꽃 동산을 살육하는 금속성의 파괴음이다. 사라져 가는 것과 새로운 것이 뒤바뀌는 교차 음이 그토록 처절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몰락한 귀족의 집안에서 농노 생활을 하던 자가 주인의 벚꽃 동산을 사들여 그것을 여지없이 망가뜨린다' 안톤 체홉의 단편 '벚꽃 동산' 의 마지막 장면이다. 화려한 그 옛날의 영화가 도끼질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만다. ▲ 시민의 날 벚꽃축제

청주의 벚꽃 동산인 무심천 제방도 한때 이처럼 수난을 겪었다. 60대 이상의 노년층에서는 예전의 무심천 벚꽃거리(일제 때는 '사쿠라 마찌'라 불렀다)를 거의 기억한다. 벚꽃은 청주기계공고에서 청주중까지 이르는 제방도로를 가득 채웠다. 이 도로는 청주시민에게 있어 더없이 좋은 산책로였다.

봄 벚꽃놀이가 시작되면 진해 군항제를 방불케 하리만큼 인파가 북적거렸고 그 틈에 거리의 사진사도 한 몫 끼어 들어 추억의 한 장면을 간직해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청주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벚꽃 동산에 도끼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방 후 반일감정에다 벚꽃 나무의 고사(枯死)에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벚꽃나무는 60년대까지 있었으니 반일 감정이 작용했다면 해방직후에 베어 없어졌어야 할 일 아닌가.

물론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된 것이지만 주된 원인은 역시 벚꽃의 고사에 따른 도시 미관상의 문제인 듯 싶다. 청주공설운동장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현 청주기계공고 운동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구기 종목은 물론 복싱대회까지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무심천 제방은 경기장의 자연적 스탠드 구실을 했다. 구경꾼들은 무심천 제방을 짓밟아 댔고 극성스런 사람들은 나무 가지에 올라가 나무를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하루 이틀도 아니요, 5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으니 벚나무인들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시 당국은 벚나무를 베어 근 10년 동안 황량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72년 채동환 청주시장이 재직할 당시 청주시민간단체협의회에서는 이를 협의, 주머니를 털어 무심천 변에 나무심기 운동을 벌였다. 수양버들과 벚꽃을 심고 제방 곳곳에 벤치를 만들었다.

벤치는 나무 결을 본 뜬 시멘트 제품이었는데 어찌나 정교한지 시민들은 이 벤치가 나무제품이냐 시멘트제품이냐를 놓고 더러 내기를 걸기도 했다. 수양버들은 무심천과 잘 어우러지며 운치를 더해 주었으나 꽃가루 공해가 심해 수종갱신에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 논의 끝에 옛 날의 벚꽃동산을 되살리자는 여론이 일어 벚나무를 다시 심기에 이른 것이다. 그때 심은 벚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봄이 오면 무심천 제방은 벚꽃 축제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옛 모습보다도 더 훌륭한 벚꽃동산이 조성된 것이다.

   
▲ 60년대초 무심천 제방둑은 한적한 학생들의 휴식터였다. 오른쪽이 청주공고 교정이 보이는 오늘날의 무심동로 옛모습


이 곳에서는 벚꽃의 개화시기에 맞춰 4월 20일을 전후하여 벚꽃 잔치를 매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통일신라시대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한 때가 '신문왕 춘삼월'(685년)이다. 음력 춘삼월이면 양력으로 4월20일 경에 해당한다. 이때가 되면 상춘인파에 무심천은 벚꽃과 더불어 시민의 웃음꽃이 만발한다. 연인들끼리의 데이트는 물론, 가족단위로 봄나들이를 나온 상춘객을 맞기에 바쁘다. 벚꽃은 사진을 찍는데 훌륭한 배경이 된다. 순식간에 주변의 전답을 휩쓸던 '무심천' 이 이때만은 '유심천' 으로 변한다.

하천도 계절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모양이다.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이나 원산지가 제주도이기 때문에 이에 연연할 것이 못된다. 벚꽃과 강태공과 연인들이 어우러진 '무심천 환타지' 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러한 꿈은 수질오염을 막고 무심천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청주시민 모두가 청주의 젖줄, 무심천 가꾸기에 적극 나설 일이다.  <임병무>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