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고 한 말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마태오 21:42~43절)

강현우씨(스테파노·45)는 자신의 삶에 대해 ‘요철’부분이 많았다고 돌이킨다. 울퉁불퉁한 삶의 편린들, 그래서인지 그의 시(詩)에는 음울한 정조(情調)가 묻어있다. ‘블루 계통’의 시라고 할까, 그의 시 한 편을 보자.

‘사물들은 저마다 내게 사막의 안부를 묻는다’

사막은 얼마나 생각할 것이 많으면 그렇게
한 생애를 걸었을까

소금은 얼마나 인생의 짠 맛을 보았으면 그렇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을까

얼음은 얼마나 고뇌에 차면 그렇게
마음을 차갑게 닫고 있을까

우물은 얼마나 후회가 깊으면 그렇게
마음 깊이 눈물을 감추고 있을까

심해어는 또 얼마나 마음을 강하게 먹었으면 그렇게
심해의 압력과 어둠을 견디고 있을까

별은 또 얼마나 말 못할 과거가 많으면 그렇게
먼 곳까지 달아나 있을까.

강씨의 고향은 벚꽃 군항제로 유명한 경남 진해.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새로운 몫의 삶으로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 첫 불행이 닥친 것은 첫돌 전.“첫돌 전에 경기(驚氣)를 앓았다더군요. 고열로 병원에 실려갔는데 주사맞은 것이 잘못 돼 뇌성마비가 찾아왔다더군요.”두 살 때 그는 버림을 받았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그를 그를 낳아준 부모는 버렸다.“두 살 때 버려졌으니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낳아주신 부모님 얼굴도 모르고 그 분들의 마음도 모르고 제가 살던 집도 알지 못하지요. 놀이터에 버려져 울고 있는 저를 지나가시던 한 아주머니가 주워 길렀는데 그 분이 저를 길러주신 진짜 어머니예요.”강씨를 기른 어머니 정애자씨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우연히 놀이터를 지나가다 울고 있는 아기를 보았는데 정상아가 아니었다. 정씨는 집안에 남자가 없었다. 남편을 일찍 잃고 딸과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정씨는 아기를 보는 순간 생각했다. 이 아기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리라.“어머니는 너무 고우신 분이었어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분이셨죠. 당신께서는 진정으로 저를 사랑해주셨어요. 그 분은 꿈을 갖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 분이 소망하시던 것은 작은 복지원을 하나 세워 어려운 이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었죠. 그런 뜻이 있으셨던 분이었으니 장애를 앓고 있는 저를 데려다 길러 주신 게지요. 전 사실 제가 그 분의 친아들인 것으로만 생각했었어요. 그만큼 저에게 잘해주셨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제가 주워온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요.”그때 강씨는 집안 정리를 하다가 메모지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 메모지에는 강씨의 출생 비밀이 적혀 있었다. 강씨를 낳은 어머니라는 이가 강씨를 싸서 버린 보에다 그 메모지를 넣었다. 본명이 강승기라는 것을 적어.“기른 어머니께서 이름을 강현우라고 고쳐주셨지요. 어머니께선 포목점을 운영하셨어요. 그래서 집안 살림이 넉넉한 편이었어요. 제가 자라면서 어머니는 저의 재활치료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셨어요. 늘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재활치료를 하셨지요. 서울 올라와서 세브란스 재활원 그 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어머니는 저를 직접 이끄셔서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열심히 치료해 주셨지요. 학교도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나왔어요. 어머니께서는 저를 ‘담금질’해주시려는 의도로 일반학교로 보내셨던 거죠.”강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어머니는 아예 서울로 이사를 왔다. 강씨는 서울 신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서 강씨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강씨는 배려 깊은 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장애을 갖고 있어 내면적으로 ‘난 소외된 사람이다’라는 피해 의식을 늘 갖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저를 진정한 친구로 대해주었어요. 그 친구들 덕분에 장애의 허물을 벗고 동등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지요. 재활치료도 성공적이어서 약간의 어눌한 언어만 빼고는 모두 정상적이었어요. 축구도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장자의식(長子意識)이란 우리의 전통습성으로 볼 때 큰 무게를 지닌다. 비록 길거리에서 들어온 자식이었지만 강씨는 늘 장자의식을 가지려 노력했다. 아니 그의 품성으로 보아 그가 가졌던 장자의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성장하면서도 그의 집안에 남자라고는 자신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늘 그에게는 장자의식에 대한 일종의 압박감으로 다가왔었다. 성장하면서 그는 늘 생각했다.‘우리 집안에 남자는 나 뿐이구나.’무거운 짐과 책임감을 느꼈다. 생각의 깊이도 책임감 만큼 깊어지고, 또 그 압박감 만큼 그는 정신적인 성장을 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늘 말했다.“니가 하고 싶은 것, 모든 것 다 하거라.”그는 음악을 좋아했다. 그러나 포기했다. 음악을 좋아하면 할수록 많은 돈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피커 하나의 차이만으로 음악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스피커 하나의 차이라는 것은 기백만원의 돈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오디오를 사고 싶었고, 좋은 스피커를 사고 싶었지만, 그는 늘 그런 생각이 자신에게는 사치였다고 생각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먼 이야기라 치부하곤 했다. 그렇듯 그는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절제를 갖고 있었다.“어머니께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제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쌓으라는 말씀이셨지요. 그렇지만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저는 가장이었거든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늘 저를 놓아주지 않았거든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가 대학까지 나오려면 그만큼의 돈이 들어가는데, 지금까지 어머니께서 제게 해주신 헌신도 눈물겨운 일인데…… 결국 저는 서울공고를 들어갔어요. 그리고 어머니껜 죄송하다는 말씀으로 용서를 구했지요. 어머니께서는 제 속내를 아시고는 절 끌어안으시고는 한없이 우셨어요. 어머니께서 우시는 모습을 그때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천사같으신 어머니, 늘 강하시던 어머니께서 우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모두가 제가 못난 탓이구나라는 자책감을 가져야 했지요.”강씨는 서울공고를 졸업하고 한양공대 건축공학과 77학번으로 입학했다. 합격하고 나니까 어머니께서는 그에게 말했다.“니가 내 소원을 이루었구나!”그는 울면서 어머니께 말했다.“어머니 머리에 학사모를 씌워드릴 테니 저를 너무 꾸짖지 말아주세요.”대학생활은 좋았다. 젊음이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캠퍼스에는 낭만이 넘쳐 흘렀고 젊기 때문에 또 그들은 아름다웠다. 강씨는 그러나 아름다움을, 젊음을, 낭만을 느끼기엔 자신이 살아온 길이 너무 험했다. 그 험한 길을 어머니는 언제나 묵묵히 지켜주셨다. 그는 낭만을, 젊음을,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돈으로 학비를 댔고 용돈을 충당했다. 그 길이 어머니에 대한 작은 효도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어머니!문득 초등학교 때의 일이 떠올랐다. 강씨는 소풍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소풍길이라는 게 대체로 먼 길인데, 어머니는 늘 그를 업고 가셨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작은 어깨, 그러나 너무나 포근한 어머니의 등. 서울 우이동 아카데미 하우스 옆 신익희 선생 묘까지 가는 소풍길에 어머니는 내내 그를 업고 가셨다. 그 험한 산길을 오르시면서도 어머니는 단 한 번 힘들다는 내색조차 않으셨다. 업혀가면서 그는 내내 울었다.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느끼신 어머니께서도 소리죽여 우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말했다.“어머니, 어머니 머리에 왕관은 씌워드리지 못하더라도, 학사모만은 꼭 씌워드릴 게요.”어머니는 고개만 끄덕이셨다. 말씀을 하시면 그것이 눈물이 될까 두려우셨기 때문이었다.“지금 생각하면 하느님은 참 공평하신 분 같아요. 자비로우신 분이에요. 비록 제 건강을 가져가셨지만 제 주위에는 제 건강보다 더 값진 좋은 분들을 보내주셨으니까요. 그 은혜, 말로 표현할 길 없지요.”휴학과 복학의 잦은 번복으로 그는 1985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취직을 했다. 중소기업체였는데, 그는 그 곳에서 설계를 담당했다. 일이 전문직인만큼 보수도 꽤 높았다. 승진도 빨랐다. 열심히 일을 했다. 리비아도 다녀왔고 싱가포르 파견 근무도 훌륭히 마쳤다. 그리고 한국에서 현장근무를 맡게 됐다.1988년 창원에서 그는 현장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 건설현장이었다. 아파트를 지을 땐 크레인을 통해 레미콘 빔을 치게 되는데 레미콘의 비율이 얼마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 비율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비율을 검사하러 꼭대기로 올라갔다. 검사를 마치고 그는 아파트 외벽에 임시로 만든 통로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모든 것이 갑자기 땅으로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건물밖 외벽에 임시로 만든 통로 구조물이 갑자기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그는 5층의 높이에서 땅바닥을 향해 그대로 추락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그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그동안 번 돈은 병원비로 모두 지출됐다. 병간호는 어머니께서 도맡으셨다. 어머니의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 수술을 두 번 받았다. 머리뼈를 깎아내고 응고돼 있는 피를 두 번이나 제거했다. 의사는 어머니께 강씨가 회복불능이라고 말했다. 평생 저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평생을 들여 재활치료 하며 제 몫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아들이 이젠 도저히 회복불능이라는 말에 어머니는 너무 큰 충격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것은 병이 되었다.결국 어머니는 강씨의 사고에 대한 너무나 큰 충격으로 운명하셨다. 어머니께서 작고하신 후 친구들은 서로 모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강씨는 뇌출혈이었다. 흉추와 척추를 다쳐 지금까지 가슴 밑으로는 마비가 돼있는 상태다. 왼손은 완전히 마비 됐고, 오른손은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정도다.병원서 퇴원을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그를 결혼한 친구가 거두어주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들리는 말들. 자신 때문에 친구와 친구 아내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나 꽃동네로 데려다 달라.”그 친구는 꽃동네에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1990년 12월 9일 꽃동네는 강씨를 거두어주었다.“96년부터 희망의집 관리실 업무를 보았어요. 그땐 손놀림이 비교적 자유로울 때였지요. 97년초부터 98년 2월까지는 천사의집 관리실 업무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면서 보았구요. 그런데 하루는 수녀님께서 너무 힘들 테니 그만두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제 삶의 팽팽한 긴장감이 한꺼번에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명퇴’ 당하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할 만했지요. 과연 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조금은 흔들리기도 했구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점점 더 몸이 굳어지는 것이에요. 손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되구요. 퇴행성 류머티스 관절염이라 하더군요. 지금도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굳어가고 있어요. 굳어가는 고통,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워요. 너무 아파서 보통의 메트리스에선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에어 메트리스에서 잠을 자는데, 그것도 잠시, 지금은 에어 메트리스에 누워도 온몸의 통증 때문에 잠을 쉬 이룰 수 없지요. 요즘은 잘 때 씨디 케이스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다 편 상태에 압박붕대를 감아서 잠을 청한답니다. 손을 완전히 못 쓰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런 기도를 드려요. ‘주님, 제 손으로 제가 밥을 먹을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십시오. 그때 절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겠습니다.’ 늘 고통스러운 육신이지만, 그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글이라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지요.”그는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다고 한다. 온몸이 굳어가고 있는 두려움. 마치 화석인간처럼 돼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면서도 그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는다고 한다. 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어차피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지고 가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단지 주님께서는 고통을 주시더라도 그 사람이 참고 견딜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다.자신의 고통을 누가 대신할 것도 아니고, 누가 덜어준다 해서 쉬 덜어질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것이 자신의 삶의 무게라면 스스로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현명한 길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 소중한 것임을 그는 배운다고 한다. 그리고 고통을 잊으려 그는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은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것이었다. 한때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가졌었다. 1993년 MBC에서 수기 현상공모가 있었다. 강씨는 그때 응모했다. 그것으로 그는 글을 쓰겠다는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고 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손을 글을 쓰는데 바쳐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2001년에는 문학세계에 응모한 시가 신인문학상에 올랐다. 그때부터 그는 정식으로 등단한 문인이 됐다.

그에게도 첫사랑의 로맨스는 있었다. 결혼까지 약속한 여자였는데, 사고가 난 후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는 그 추억에 대해 “기억이 너무 아파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꽃동네는 그에게 처음에는 하나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이제는 꽃동네가 그에게 하나의 ‘오아시스’가 되었다고 한다. 사막에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그의 삶의 지평에서 꽃동네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란다.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퍼주어도 그 기쁨과 사랑과 희망이 그대로인 사람, 삶에 새로운 용기와 꿈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제 삶의 가치를 정리하고, 살아 온 길을 정리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비우려는 노력, 나누려는 마음을 유지하려고 기도를 올리곤 합니다. 그러면서 늘 생각하죠. 내가 미소의 진원지였으면 좋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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