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충북에는 산맥을 따라 산성이 이어달리기를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산성이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이다.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은 이 산성은 둘레 1680m로 오정산(烏頂山)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안은 듯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이 성은 3년에 걸쳐 쌓았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란 명칭이 붙었고 신라시대 보은의 명칭은 삼년 군, 또는 삼년산 군이었다. 삼년산성은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성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축성의 비밀이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의 성이다.

우선 성벽을 보면 그 단단한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구들장처럼 납작한 현무암 계통의 돌을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가로 세로로 엇물려 쌓았다. 안쪽 바깥쪽 성벽이 모두 돌이고 가운데도 돌로 채운 협축 산성이다.

체성(體性)과 돌출부위인 치성(雉城)의 연결방식은 거의 직각으로 만나고 있음에도 덧씌우기가 아니라 논스톱 공법을 연상케 하는 엇물림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되었다. 동쪽 성벽의 높은 곳은 13m가량 되는데 단순히 높이만 따지면 만리장성을 능가한다. 1980년도 수해 때 드러난 서 문 터는 성문의 특수구조를 유추케 한다. 즉 삼년산성의 성문은 안에서 안쪽으로 당겨 여는 방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안에서 밖으로 밀어서 여는 방식이다. 성문에 빗장을 걸면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인 660년 9월 28일, 당의 고종은 백제의 땅을 통치하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部)를 설치하며 웅진도독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로 하여금 황제의 조서를 무열왕에게 전달케 하는데 그 장소가 왕도인 경주가 아니라 바로 삼년산성이었다. 아마도 당의 침탈 욕망을 꺾기 위해 일부러 규모가 웅대한 삼년산성을 택한 것 같다. 그후 삼년산성은 성 쌓기에 어떤 교과서 역할을 한다. 어떤 성을 쌓을 때는 반드시 삼년산성과 비교하여 기준점을 잡았다.

배수구는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동쪽 배수구는 잘 남아 있다. 지상으로부터 1m 정도 위쪽에 있는 배수구는 성벽으로부터 15cm 정도 돌출되어 물이 성벽으로 스미는 것을 막았다. 장방형의 배수구는 계단식으로 설계되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진다. 이 통로를 통한 적병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다.

현지에서는 이곳을 장수 굴이라 하여 촛불을 켜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굴 안에서 찬바람이 나오기 때문에 나무꾼이 도시락을 이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먹기도 한다. 이 성은 1982년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숱한 비밀을 풀고 있는데 최근에는 연못인 ‘아미지’에 대해 중점 발굴을 실시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성 이름에 ‘삼년’이라는 숫자가 붙은 곳은 이곳밖에 없다. 때마침 우리나라 전래동화로 ‘삼년 고개’라는 게 있다. 장에 갔다 오던 노인이 삼년 고개에서 넘어져 삼년 밖에 못산다는 얘기를 믿고 앓아 누었다. 목숨이 저승길을 오가는데 이웃 집 아이가 와서 ‘한 번 더 그 고개에서 넘어지라’고 권한다. 한번 넘어지면 3년, 두 번 이면 6년 열 번이면 30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때 소년은 숲에 숨어서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이 고개에서 6만번을 넘어졌다”고 귀띔한다. 할아버지의 병은 말끔히 낳았고 장수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연상케 하는 설화다. 삼년산성에 삼년고개를 만들어 관광객의 ‘뒹굴기 장수이벤트’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