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자살의 옳고 그름에 관해서는 윤리관과 종교관에 따라 여러 의견이 제기 되어 왔습니다. 자살 긍정론자들은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에 관해서 절대적 선택의 권리를 가진다는 윤리적 입장을 주장하는 반면 부정론자들은 신에 대한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죄악시하고 있습니다.

자살의 원인에 대해 프랑스의 사회학자 E·뒤르켐은 자살에는 이기적(利己的)자살, 애타적(愛他的)자살, 아노미적(anomi·무규제상태)자살의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개인과 사회와의 결합력이 약할 때,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할 때, 사회정세의 변화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에 의한 자살 등이 그것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매년 1만 수 천명이 자살을 하고 있으며 35만 여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 1만1794명이던 자살자수는 2001년 1만2277명, 2002년 1만3055명으로 해마다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런 증가율은 OECD(경제협력 개발협력기구) 29개국 가운데 단연 선두라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날마다 36명이 목숨을 끊고 96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40분에 1명씩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럼 근년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자살자가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학자들은 사회가 급변하고 규범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장기 불황에 따른 청년실업 급증, 기초생활대상자 및 차 상위 빈곤층의 증가, 사회 안전망의 절대부족, 아파트 값 폭등 등의 부의 양극화에 따른 절망감 등 주로 경제난 심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이 꼭 사회적 약자만의 것이 아닌 지도 모릅니다. 재벌회장, 자치단체장 등 저명 인사, 대법원장을 지낸 국가원로마저 스스럼없이 죽음을 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살은 유행을 탄다고 합니다. 실제 18세기 유럽에서 괴테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뒤 자살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실연한 주인공 베르테르의 권총 자살이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자살바람이 사회 병리 현상인지, 유행 때문인지는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두 번쯤 자살을 생각해 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생활고로, 빚 때문에, 신병으로, 성적이 나빠서, 살기가 싫어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결행하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사람,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자살을 택합니다.

지난 주 아파트에서 투신한 윤석용 주성대학 이사장의 죽음은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하여 대학까지 설립한 그의 능력과 입지전은 지역사회의 본보기였으며 대학의 위기극복을 위해 중국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목숨을 끊은 당사자의 속마음이야 오죽했으랴 마는 한 순간 생각을 달리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은 필자만의 소회(所懷)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윤이사장의 죽음을 통해 인생은 참으로 허망하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합니다. 부든, 명예든, 권력이든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생은 덧없는 것임을 보게되니 말입니다. 오호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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