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월북비화'보도 '대응가치 없다' 일축

정지용 시인의 '월북비화'를 인용한 월간 중앙 2월 호의 보도에 대해 17회 째 지용 문학제를 치러 오고 있는 옥천군을 20일 본보기자가 직접 방문해 지역주민들의 반응을 알아 봤다.
/ 편집자주.

20일 서청주IC를 출발해 옥천IC를 들어서자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인 정지용 시인을 홍보하는 상징 조형물들이 눈에 쉽게 띄었다.

옥천군이 지용문학제 등을 통해 문향의 고장으로 지역의 홍보에 얼마나 열을 올리고 있는지를 한 눈에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아파트나 가게 상호 등이 정지용 시인의 시 '향수'를 따라 부르는 곳도 많았다)

우선 지역 주민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읍내 시장을 거니는 시민들에게 지용문학제와 최근 대형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월간 중앙 2월 호의 정지용 시인 월북<실화>보도에 대한 견해를 물어봤다.

하지만 대체로 "모른다"와 "옛날부터 비일비재하게 다뤄지던 하나의 설에 불과 하다"며 "잡지사가 또 하나의 읽을 거리를 만들었다"고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옥천 지역에 유족들이 살지 않는 관계로 옥천 신문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01년에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이라는 해설 판을 낸바 있는 김성장 선생을 찾아 견해를 들었다.

내가 아는 정지용은 민족주의자
김 선생은 옥천신문의 조주현 편집부장의 말처럼 "옥천문인협회나 옥천문화원 등에 큰 반응은 없다"며 "충북인 뉴스 홈페이지에 오른 기사를 통해 처음 확인했고 가십 거리에 불과한 일을 확대 해석해 다룬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한 "내가 아는 정지용 시인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일제 강점기에는 글쓰기를 거부했고 해방이후에는 토지개혁과 일제청산 운동을 펴신 분"일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당시의 60% 이상의 지식인이 조선왕조 이후 사회주의 체제가 가장 우리민족 정신에 어울린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며 이는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이념적 논쟁거리로 가늠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선생의 해설서 에는 정지용 시인에 대해 월간 중앙 2월호가 인용 보도한 김태운 1954년 <실화>의 두가지 설이 포함된 △월북설(정부) △납북설(계광순) △월북중 폭사설(정구인) △미군에 의한 처형설(김양수) 등의 4가지 설을 다루고 있었다.

"1950년 그의 나이 49살에 6.25 발발 이후의 행적에 대해 증언이 엇갈림, 행방불명의 시기는 7월말인데 조선문학가 동맹 회원으로 활동한 5명 이내의 사람들과 함께 나갔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의 출판과 접근이 금지되었다가 88면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출판이 허용됐다"라고 정지용의 연보를 다뤘다.
끝으로 김 선생은 "아직도 극우 세력에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일제의 앞잡이나 기회주의자들이 많다"며 "그런 극우 세력에게는 지식인 정지용은 극좌파에 해당 돼 축출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들
정지용 시인을 연구하고 아이들에게 알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서 가르치는 또 한분의 선생이 있어 연락을 취했다.

옥천신문에도 '노한나의 입말로 풀어쓰는 이야기 정지용'이란 연재물을 32회 실은 바 있는 노한나 선생은 "사상적 논쟁은 잘 모르겠다. 단지 우리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시 단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를 찾아 오라 하면 정지용의 시를 찾는다"며 "한국 현대시의 거장으로 지역을 빛낸 분에 대해 작금에 와서 한 때의 논란의 비화에 쓴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김태종씨는 충북인뉴스의 관련 글 소개에 대한 댓 글에서 '다시 듣게 되는 정지용 선생의 소식을 들으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 시대의 큰 별 지용 선생의 소식을 들으며 또 다시 온갖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것과, 남쪽에 남는 것이 죄악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글은 우리 역사의 단면을 다시 보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당시에 선생의 월북은 그분에게 있어서 최선이었다는 것, 오늘의 자리에서 당시 그분의 선택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단순한 구도로 말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봅니다"

정부가 해금을 통해 인정한 시인
노한나 선생과의 전화 인터뷰 이후 기자는 매년 옥천문화원의 지용문학제를 지원하고 있는 옥천군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화공보실 이재하 실장을 찾았다.

이 실장은 지난해 발간된 '옥천문화 2004 제 18집'에 <정지용 시인의 장남 정구관>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 하시다'라는 인물 일대기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 실장은 "지난해 4월 지용시인의 복권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큰 아들 정구관씨가 돌아가신 뒤에 이런 기사가 발표돼 안타깝다"며 "49세에 행불자가 된 지용 시인을 16살이나 어린 33세의 나이에 박창현이라는 가명을 쓰며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지용 시인이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적 인물이고 그의 문학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해금한 인물임으로 지용 문학제의 위상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 덜된 군사정부도 인정
이재하 옥천군 문화공보실장과의 짧은 대화 이후 내가 찾은 사람은 옥천문화원 이인석 원장이다.이 원장은 "1954년 탐사보도 자유기고가인 김태운씨가 술자리에서 주어들은 얘기를 가지고 확인 없이 쓴 것을 월간 중앙 기자가 재 확인 없이 인용해 쓴, 가치 없는 기사에 불과하다"며 "88년이면 전두환 정권에 이은 제 2 군사정부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이런 정부 아래 안기부의 시퍼런 시선이 세상을 덮고 있음에도 그 죄가 없어 해금이 되신 분인데 신중치 못하게 다룬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불쾌함을 표했다.

또한 "정이 많은 정지용 시인이 가족을 버리고 월북할 분이 아니다"라며 "나이 차이가 16년 이상 나는 박창현이라는 가명도 신뢰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어 "방송요원으로 착출 대남 선전활동을 했다는 것도 6.25 반발후 7월부터 전향 해 방송활동을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짧다"고 신빙성에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음으로 "월북을 했다면 셋째 아들 구인씨를 만났어야 하는데 지난 2001년 2월 26일 서울 반포동 센트럴시티에서 갖은 이산가족 상봉에서 셋째 아들 정 씨가 장녀 구원씨를 찾아 상봉했을 때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한 것이 이상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읽을 거리 위주의 흥미보도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면서도 "21일 문화원에서 있을 정기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유족들이 월간 중앙을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소를 제기할지 아니면 문화원 차원의 유감 표명을 할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개인적 견해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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