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 말없이 흘러만 가매 무심천이라 부르던가 <임병무>

 무심천 지명의 유래
우암산(牛巖山)이 청주의 아버지라면 무심천(無心川)은 청주의 어머니이다. 서원문화는 바로 무심천을 젖줄로 하여 피어난 것이고, 보다 넓은 범주의 중원문화는 남한강과 금강을 어머니로 삼았다.

때로는 젖 꼭지가 말라 하천 바닥을 드러내지만 홍수 때가 되면 성난 물살이 밀려와 문화의 전답을 흠뻑 적신다. 청주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무심천은 천년고도 청주의 영욕을 간직한 채 어제도, 오늘도 까치내(鵲川)로 흘러든다.

" 그 옛날 어느 분이 애 타는 무슨 일로/ 가슴을 부여안고 이 냇가에 호소할 제/ 말없이 흘러만 가매 무심천이라 부르던가// 눈물이 실렸구나 보태어 흐르누나/ 원망이 잠겼구나 흐르는 듯 맺혀 있어/ 지금도 여흘 여흘이 목이 매어 우느나"

노산 이은상의 시 '무심천을 지나가며' 에서 보듯 냇물은 인간사의 숱한 사연을 쓸어 내리며 행로를 재촉한다. ꡐ무심ꡑ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사바세계의 시시콜콜한 사연들은 흘러가는 냇물처럼 부질없는 것이요, 한번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인생살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무심천' 지명은 상당히 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수질오염에서 깨어나고 있는 무심천은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르며 문화를 일으키고 추억을 수놓는다. 철부지 하동(河童)들이 피라미떼를 쫓고 물장구를 치며, 한 겨울이면 물을 가두어 놓고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의 편린들이 유년의 영사막에서 꿈틀거린다.

아련한 기억들이 둥실 떠다니는 무심천. 그러나 '무심천' 이라는 내의 이름이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명이란 오랜 세월을 불특정 다수인에 의해 불려지다가 굳어지는 게 통례다.

▲ 남주동쪽에서 바라본 부심천. 아래쪽 다리가 구 모충교, 신모충교이고 그위에가 남사교이다. 동국여지승람엔 무심천을 대교천(大橋川)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교천은 고을 남쪽 1리에 있는데 근원은 적현(赤峴)에서 나와 오근진(梧根津)으로 흘러간다" 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대교란 땅속에 묻혀있는 남석교(南石橋)를 일컬음이다. 냇물위로 박혁거세 원년에 세웠다는 남석교가 있고 그 옆으로는 지방 출장 시, 관리들의 숙박시설이었던 정진원(情盡院)이 위치해 있었다.동국여지승람의 이러한 기록으로 봐서 구한말까지는 냇물 이름이 '대교천'이었다가 일제 초기부터 ꡐ무심천ꡑ으로 불리지 않았나 하는 추정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견해를 통째로 뒤집어 놓은 결정적 자료가 지난 1998년에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고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던 '무심천' 지명이 느닷없이 옛 지도에 등장했다. 그 오랜 세월을 역사의 행간 속에서 꼭꼭 숨어 있다가 세인의 눈에 비로소 발견된 것이다.서원향토사연구회가 지난 1998년 8월,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열린 영남대 소장 '한국의 옛 지도전' 을 섭렵하다가 호서전도(湖西全圖)중 청주목 지도에서 붓글씨로 깨알같이 표기된 '無心川' 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가로 19cm, 세로 15.8cm 크기의 이 지도는 채색 필사본으로 작자는 알 수 없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이 지도에는 청주 읍성이 선명하고 산천, 행정구역 등을 표기해 놓았는데 운천동 북쪽 봉림숲(북숲)뒤편을 흐르는 냇물을 '無心川' 이라 적었다.이로 보면 내의 이름이 일제 초기부터 '무심천' 으로 불리웠다는 통설과 달리, 적어도 2백년 이전부터 현재처럼 '무심천' 으로 불리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처럼 표기해 놓았으므로 어쩌면 수백년 전부터 '무심천' 으로 불리웠을지도 모른다.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교천은 현재 꽃다리 일대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무심천 본류와 금천동에서 내려오는 쇠내(金川) 지류가 합쳐지는 꽃다리 일대를 대교천이라 부르고, 하류는 무심천으로 부르다가 구 한말부터는 그냥 '무심천' 으로 통용한 듯 하다.일제시대에는 무심천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고 여러 문헌에도 무심천이 등장한다. 1923년 일인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峯)는 그의 저서 '청주 연혁지' 에서 무심천의 잦은 범람을 기록하고 있다.' 흐르는 물결과 인생의 행로처럼 변하기 쉬운 것도 없다고 옛 사람들은 한 숨 지었을 것이다. 청주의 무심천이 바로 그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이 개울의 수원(水源)에 해당하는 연봉(連峰)은 산골(山骨)을 노출하여 빨갛게 벗겨진 곳이 많기 때문일까. 평소에는 흐름이 완만하고 수량도 많지 않으나 한번 우계(雨季)가 닥치면 범람, 광노(狂怒)하여 양안(兩岸)의 전답을 씻어 떠내려가게 하여 부근을 황폐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무심천은 무심할 정도로 주변의 문전옥답을 순식간에 쓸고 지나가니 하늘도 무심하다 하여 '무심천' 이 됐다는 얘기가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없다. 하천 이름과 관련된 또 하나의 설은 임란 당시의 이야기다. 한 병사가 왜적을 맞아 용감히 싸워 이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무심천에 빠져 죽었더라는 것이다. 출정한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져 그 아낙은 바위에 올라 짚신을 벗어둔 채 물 속으로 투신했다는 내용으로 그 뒤부터는 무정한 마음을 한탄하여 '무심천' 이라 불렀다는 설이다.영화 '워털루 브리지'(애수)를 연상케 하는 이야기이나 이 역시 무심천 지명의 유래와는 거리가 먼 듯 하다.세 번째 이야기는 불가(佛家)와 관련된 이야기로 가장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려시대의 국교는 불교였고, 따라서 많은 사찰들이 도시 중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대부분의 사찰들이 산 속으로 숨어 들었으나 고려시대에는 도심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 무심서로 중간에 위치한 용화사
경주의 황룡사, 불국사 등이 그러한 예이고 청주에 있던 나말 여초(신라말 고려초)의 사찰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국보 제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 이 말해주듯 용두사(龍頭寺)는 청주 한 복판에 있던 절이다. 무심천가에도 절이 꽤 많았다. 대표적인 절이 용화사(고려시대에는 思惱寺로 추정됨), 운천동 사지 등이고 한발짝 떨어져서는 세계인쇄문화의 메카인 흥덕사가 있었던 것이다. 무심천은 이러한 불교 문화의 젖줄이 되었고 또 그러한 역사적 맥락아래 탄생한 것이 바로 '무심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 문화와 무심천은 이처럼 상호보완적 관계를 가지며 서로간에 문화와 이름을 부여한 것 같다.

무심천 이름의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고려중기의 고승,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의 사상과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눌(知訥)에 이어 선종(禪宗)의 법맥을 이은 혜심은 한때 무심천변 사뇌사에서 여름 수련회격인 하안거(夏安居)를 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ꡐ무심론자ꡑ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음가짐에 있어 무엇보다 '무심' 을 중히 여긴 것이니 이 무심이야말로 참다운 마음이라 한다. <국사편찬위 간, 한국사 7권> 

"무심이라 함은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게 하여 놓은 상태이지만 비우게 한다는 그 마음도 없애야 하며, 다시 나아가서 비우게 한다는 그 마음을 없애는 그것조차도 또한 없애야 한다." 다소 난해한 법어이지만 무심의 에스컬레이터 현상을 읽을 수 있다. 이로 보면 공식명칭은 '대교천' 이라 했고 별칭을 '무심천' 으로 했음직도 하다. 또한 고려시대에 무심천으로 부르다가 대교천으로 바뀌었고 5백년이 지나 다시 무심천으로 환원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만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무심천의 발원지
무심천 발원지는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와 가덕면 수곡리, 내암리 일대이다. 충북도지에는 무심천의 발원지를 남일면과 낭성면 경계에 있는 선도산(仙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실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좀 더 조사해볼 과제다. 상당산성에서 발원하여 선도산 근처를 감도는 냇물은 운암~어암을 지나 괴산 목도(牧渡)를 거쳐 달천(達川)으로 흘러드는 남한강의 지류이기 때문이다.

추정리 산꼭대기에 달라붙은 마을을 자연지명으로 '산정말' 이라고 한다. 산꼭대기인 산정(山頂)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어귀에는 작은 옹달샘이 있는데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벽계수와 합쳐져 무심천의 원류가 된다. 가덕면 내암리 일대를 흐르는 벽계수는 물이 맑기로 이름나 피서객들이 종종 찾아드는 곳이다. 추정리와 내암리의 냇물은 계곡을 솟구쳐 흐르다가 금거리에서 서로 합친다. 이곳서 무심천은 물길의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문의면 남계리에 이르고 다시 고개를 꺾어 북류한다. 여기까지 흐르는 무심천 연변에는 문주리, 은행리 부근과 남계리, 상대리 부근에 하곡(河谷) 평지가 발달해 있으나 토양이 비옥하지 못하다.

남계리에서 북류하는 무심천은 하상(河床)이 완만하고 넓으며 상류에서 운반된 모래가 바닥을 높여 본격적인 천정천(天井川)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고은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대머리 평야는 토질이 비교적 비옥하고 물꼬대기가 좋아 예로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소문나 있다.  고은리, 신송리, 효촌리 일대 무심천 변에는 오창 뜰과 거의 맞먹는 산간분지가 잇따라 펼쳐져 청원군 일대의 유수한 곡창지대로 손꼽힌다.

   
▲ 무심천 물길 옆웅로 비옥한 농지가 조성돼 유수한 곡창지대를 이루었다.

무심천의 작은 지류 하나는 분평동, 산남동에서 발원하고 미평동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있는데 실개천에 불과하다. 두 하천은 분평교(속칭 분동다리)아래서 합쳐져 영운동 원마루 앞서 무심천 본류와 합친다. 금천동에서 내려오는 '쇠내' 는 꽃다리 부근서 본류와 몸을 섞는다. 결국 큰 가람(강)도 시작은 이처럼 한 방울의 물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임병무>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