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호>

우암산 이타(利他)의 암소를 닮은 청주의 진산
 청주의 진산(鎭山)은 우암산(牛巖山)이다. 나라의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자리한 산을 진산이라 부른다. 요새 지리학 개념으로 본 우암산은 그 뿌리를 소백산맥에 두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산맥체계를 정리한 산경표(山經表)*대로 하면,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에 들어간다.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진 한남금북정맥은 속리산(俗離山)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충북과 경기 일부지역까지 산자락을 깔았다는 것이다. 속리산은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산제를 올렸던 신성한 산이 아닌가. 그런 정기가 면면히 뻗친 우암산은 누가 보아도 청주의 진산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암산 서남쪽 기슭 당이산(唐山)에는 성황사(城皇祠)가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같은 조선시대 기록에 나온다. 우리네 토착신앙에서 성황신은 땅과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을 말한다. 그 신주를 모시는 집이 성황사니, 오늘의 동공원자리 우암산 기슭 당산(唐山)은 신성한 땅이었다.

조선시대 기록은 성황사 말고도, 우암산의 토성(土城) 흔적과 절자리 따위를 들추었다. 지금도 더러 흔적이 보이는 우암산 토성터는 통일신라가 남긴 서원소경성(西原小京城)의 잔영이다. 그 뒤를 이은 고려도 다시 손질을 해서 얼마만큼은 사용한 정황이 역사기록에 나온다. 성은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한 이유는 통치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소경을 다스리는 치소(治所)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면 옛날의 우암산은 제사와 정치가 함께 이루어진 고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암산 토성의 성터는 당산까지 연결되었다. 당산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질그릇 조각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청동기인들이 일찍 우암산 기슭에 붙박이로 자리를 잡고, 한 토착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시대가 열리고 나서는 백제에 이어 통일신라와 고려가 우암산을 차지했다. 그렇듯 우암산을 딛고 지나간 역사의 발자취는 산기슭 곳곳에서 나온 고고학유물이 증거하고 있다. 청주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산이다.

▲ 청주시가지에서 바라본 우암산 정경. 이타의 동물 암소가 드러누운 형국의 산이라고 한다. 그 옛날 고대를 우암산에서 시작한 청주는 역사시대 내내 우암산에 기대어 오늘의 도시로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도시의 산이라서 여러 마을이 우암산을 빙 둘러싸았다. 그 산을 이웃하고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축복을 받은 도시인이라고 믿는다. 산이 바로 자신들 곁에 늘 함께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믿음인 것이다. 산의 정상이라야 해발 388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르고 나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산이다. 골짜기마다에서 졸졸 흐르는 물이 사철을 두고 마르지 않는다. 홀로 뾰족 솟아난 첨봉(尖峯)이 없는 지라, 덩치가 펑퍼짐한 산이다. 그런 산세로 해서 암소가 드러누운 형국이라고 한다. 우암산을 와우산(臥牛山)이라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와우산은 18세기에 만든 조선시대 지리지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로 미루어 본디 산 이름은 와우산이었던 모양이다. 세월을 따라 산 이름이 바뀐 것은 분명하나, 언제부터 우암산이라 고쳐 불렀는지를 아는 사름은 아무도 없다. 우암산이든 와우산이든 간에 두 이름은 모두 소를 상징한다. 더구나 드러누운 암소의 형국으로 보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소는 굽을 가진 젖빨이짐승 가운데도 굽이 두 개로 갈라져 짝수를 이룬 우제목(偶蹄目)에 들어간다. 사회생물학(社會生物學) 이론을 빌리면, 우제목의 암소는 어미를 잃은 남의 새끼에게도 젖을 물리는 자애로운 짐승이라는 것이다. 오직 풀만을 먹거리로 살아가는 초식동물 소는 남의 새끼도 키울 줄 아는 이타(利他)의 짐승이라는 이야기다. 우암산을 머리, 몸통, 꼬리로 나누어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몸통 중간쯤 젖자리에서 멀리는 통일신라까지 올라가는 시대에 지은 불적(佛蹟)이 나온다. 우암산 순환도로변 삼일공원 아래쪽에 자리한 지금의 대한불교수도원 경내가 거기다. ▲ 청주대 사범대 뒷쪽 용암사의 석조비로사나불좌상
불교에서는 소를 가르침에 빗대어 표현하느라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 십우도(十牛圖)라는 그림은 바로 그 소를 주제로 한 것이다. 불도를 닦기 위해 첫 발을 딛는 입문(入門)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구도(求道)의 길을 소를 통해 차근차근 풀어가는 그림이 십우도다. 모두 열 장으로 이루어진 그림 중에 가장 무게를 실은 컷은 다섯 번째다. 소를 기른다는 내용을 표현한 목우(牧牛)다. 고려시대의 고승 지눌(知訥)은 자신의 딴 이름 별호를 목우자(牧牛子)로 지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른다는 것은 퍽이나 중요한 일어어서, 성(聖)과 속(俗) 이 모두 큰 덕목으로 꼽았다.

그런 분위기로 보아 와우산(우암산)에는 목우사(牧牛寺)나 목우암(菴)이 있어야 제격일 터인데, 지금은 없다. 그러나 1757년에 나온 『여지도서』의 '청주목지도' 에서 『청주군읍지(淸州郡邑誌)』를 간행한 1890년까지 130여년 동안의 여러 자료에는 와우산 목우암이 분명히 표시되었다.

『여지도서』는 관아를 기준으로 거리를 잰 방리조(方里條)에서 목우암은  공식등록한 집 편호(編戶)가 8채이고, 남정네 13명이 절집에 산다고 적었다. 남정네들은 절에 사는 비구(比丘)인 듯하다. 그런대로 절이 꽤나 컸을 것이다. 부처 앞에 불을 밝혔던 법등(法燈)이 언제쯤 꺼졌는지 알 길은 없지만, 1923년에 내놓은 『청주연혁지 淸州沿革誌』는 주춧돌 하나가 남지 않았다는 말로 목우암이 이미 폐사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우암산 골짝에는 어디를 가나 절터가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절터만도 20군데가 넘는다. 옛날에는 곳곳에 부처가 머무른 처처불소(處處佛所)의 산이었다. 신라의 서울 경주를 본떠서 서원소경을 세운 사람들은 가까운 우암산을 경주 남산 모양으로 가꾸기 위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을 것이다. 오늘날 청주를 대표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비로사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의 제자리도 우암산이었다고 한다. 우암산 기슭 여기저기를 떠돌다 청주대학교 사범대 뒤쪽 용암사(龍岩寺)에 자리를 잡고 좌정했다.

우암산 여러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시대의 유물이 지금도 나온다. 관음사(觀音寺)가 들어앉은 옛절터에서는 아주 엄청나게 큰 무쇠가마솥이, 우암산 꼭대기 절터에서는 ꡐ천흥(天興)ꡑ이라는 새김글씨가 든 기와와 함께 고려시대 범종(梵鐘)이 출토되었다. 그 범종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물 거의가 멀쩡하지 않거니와, 예스럽고 여법(如法) 한 가람도 없다. 유교를 부추기면서 불교를 누르려고 했던 숭유억불(崇儒抑佛) 시대의 응달이 아닐는지…. 오늘의 우암산에서는 한쪽으로 너무 기울었던 편향(偏向)의 역사가 어렴풋 보인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살았던 예언가 토정(土亭)이지함(李之函)은 우암산을 돌아보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청주 사람들의 깊은 속내야 잘 모르지만, 우암산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무심천과 더불어 청주를 대표하는 산하 우암산은 여러 학교의 교가 노랫말에도 꼭 들어간다. 더구나 먹고 살만 한 시절을 만난 요즘 사람들은 건강을 챙기느라 시도 때도 없이 우암산을 오른다. 산에 오른 사람들은 곧바로 죽마고우처럼 친한 사이가 되어 온갖 기별을 산에서 말로 돌린다. 나이가 찬 자식들의 혼사(婚事) 같은 어려운 일까지도 척척 성사시키는 산이고 보면, 우암산의 이타행(利他行)은 여전히 살아있다.

옛날 육군병원 자리에서 순환도로를 올라타는 우암산 드라이브도 환상적이다. 길에 벚꽃이 활짝 피면 더욱 아름답고, 꽃잎이 져서 눈처럼 흩날리는 날도 좋다. 녹음이 시원한 여름의 싱그러움과 함께 눈이 쌓인 겨울길에서는 별미같은 맛이 씹힐 수도 있다. 순환도로를 한바퀴 돌고 나면, 우암산과 상당산성을 가르는 말안장 모양의 고개에 내려와 닿는다. 거기서는 국립청주박물관이 지척이다. 그리고 눈이 밝은 사람에게는 상당산성(上黨山城) 가는 길도 훤히 보일 것이다.  <황규호>

*산경표
조선 영조(재위 1725~1776년)때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도표의 책이다. 산맥의 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이 책은 위에 대간(大幹)과 정맥(正脈)을 표시하고 아래는 산과 봉·영(嶺)과 치(峙)를 표시했다. 백두대간에서 연결된 14개의 정간(正幹)과 정맥을 구분했는데,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그쳤다. 조선의 전통적인 산지분류체계라 할 수 있다. 수계와 연결시켜 산지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온양군(溫陽郡)․청안현(淸安縣)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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